제목 | 폴 고갱의 기독교적 이미지 사용에 대한 연구 |
---|---|
영문 제목 | An examination of Paul Gauguin’s use of Biblical imagery |
저자 |
라영환 (Young-Hwan Ra) (총신대학교 교수) |
다운로드 |
FS2013-18(4) 5-라영환.pdf
(1.66 MB)
|
논문 구분 | 일반논문 | 예술
발행 기관 | 신앙과 학문 (ISSN 1226-9425) |
발행 정보 | 제18권 4호 (통권 57호) |
발행 년월 | 2013년 12월 |
국문 초록 | 본 논문의 목적은 폴 고갱(Paul Gauguin)이 자신의 작품 속에서 기독교적인 이미지를 어떻게 사용했는가를 살펴보는데 있다. 고갱이 활동했던 시대의 화가들은 주로 종교적인 주제보다는 자연 속에서 작품에 대한 영감을 받았다.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았던 초기에는 고갱 역시 자연을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퐁트아방(Pont-Aven)에 머무르는 동안 고갱은 상징주의와 종합주의를 표방하면서 종교적인 상징이나 주제들을 자신의 작품에 자주 사용하였다. 특별히 1888년 고갱의 대표적이라고 불리어지는 《설교후의 환상, 1888》, 《황색 그리스도, 1888》,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1888》과 같은 작품들을 보면 대부분 기독교적인 이미지를 사용한 것이다. 고갱이 이렇게 그의 작품 속에서 그 시대에 흔치 않았던 기독교적인 이미지나 주제를 자주 사용하는 이유가 무엇일까?비평가들 가운데 일부는 고갱이 기독교적인 이미지를 자신의 작품에 자주 사용한 것을 예로 들면서 고갱의 작품을 종교화로 보기도 한다. 고갱이 활동했던 19세기에는 종교적인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이 그 이전 세기와 비교하여 볼 때 상당히 적었다. 이에 반해 고갱은 그 시기 다른 어떤 화가들보다 기독교적인 이미지를 많이 그렸다. 이러한 특징을 보고서 고갱의 작품 안에는 기독교적인 세계관이 담겨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토마스 부서(Thomas Buser)가 그 대표적인 경우인데 그는 고갱이 개인적인 삶에 있어서는 크리스천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논란이 많겠지만 ‘영적인 사람(a spiritual man)’이라고 주장하였다. 브래들리 콜린스(Bradley Collins) 역시 고갱이 오를레앙(Orlèans)에 있는 생메스멩 신학교 부속 가톨릭학교에서 5년간 수학한 것을 예로 들면서 가톨릭 신앙이 고갱의 세계관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웬디(Sister Wendy Beckett) 또한 고갱의 《설교후의 환상》을 고갱의 내적 체험에 대한 묘사라고 보았다. 그녀는 고갱이 야곱의 씨름을 통해 자신 안에 있는 선과 악의 갈등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의 지적과 같이 고갱은 그가 활동했던 시대의 다른 화가들에 비해 종교적인 이미지들을 자주 사용하였다. 19세기의 화가들은 이전 세기와 달리 종교적인 주제보다는 자연 속에서 작품에 대한 영감을 받았다.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았던 초기에는 고갱 역시 자연을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브르타뉴지방에 머무르는 기간 동안 고갱은 기독교적인 이미지를 자신의 작품 주제로 자주 선택을 하였다. 특별히 1888년 고갱의 대표적이라고 불리어지는 《설교후의 환상, 1888》, 《황색 그리스도, 1888》,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1888》과 같은 작품 들은 기독교적인 이미지를 주제로 그린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들은 고갱의 삶의 여정과 작품들을 통해 보았을 때 동의하기가 어렵다. 브랜드(Hilary Brand)와 아드리엔느 채플린(Adrienne Chaplin)가 지적한 바와 같이 기독교적 이미지를 사용하면서도 비 기독교적이거나 반 기독교적일 수도 있다. 또 반면에 비 기독교적인 이미지를 사용하면서도 기독교적인 메시지를 담아낼 수 있다. 따라서 고갱이 단지 기독교적인 이미지를 사용했기 때문에 고갱의 그림이 종교적이라고 보는 데는 상당한 무리가 있어 보인다. 알버트 월터스(Albert Wolters)가 기독교 예술을 기독교 예술가들이 그림을 매개로 자신들의 신앙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주장을 한 바와 같이, 만약 고갱의 작품이 종교화라는 것이 정당화 되려면 그의 작품 속에 신앙적인 메시지가 담겨있어야 한다. 하지만 고갱의 작품들에서는 그러한 메시지가 발견되지 않는다. 단지 종교적 이미지를 사용하여 자신의 정신적인 욕구를 표현하고자 할 뿐이다. 본 논문이 밝히고자 하는 것이 이것이다. 즉, 고갱이 비록 종교적인 이미지를 사용했지만 그것은 성경의 메시지를 전하기 보다는 오히려 화가로서의 좌절과 분노 그리고 그렇게 자신을 운명 지었던 하나님에 대한 거부 등을 표현하기 위함이었다. 고갱은 서구에 익숙한 종교적인 이미지를 통하여 화가의 길을 걸어가는 자신의 삶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황색 그리스도》,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고갱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독교적인 시각에서 본 것이 아니라 자신의 현실에 대한 의지를 투영하여 보았다. 고갱이 자신의 작품 《감람산의 그리스도》를 설명하면서 그림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모습은 자신의 초상화라고 말한 데서 엿볼 수 잇는 것처럼, 고갱은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문학적으로 해석하여 자신의 내면과 결합시켰다. 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 이미지는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가로서의 길을 가겠다는 자신의 결연한 의지를 드러내는데 적합한 것이었다. 고갱의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역시 이러한 고갱의 상징적인 접근들이 투영된 작품이다. 고갱의 삶에는 그가 인식하던 인식하지 못하던 신을 떠난 인간이라는 모더니즘의 인간상이 반영되어 있다. 시편기자가 말한 “훼방이 내 마음을 상하여 근심이 충만하니 긍휼히 여길 자를 바라나 없고, 안위할 자를 바라나 찾지 못하였나이다.”**** 시편 69:20라는 고백은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고갱은 예술가로서의 인정을 통해서 때론 성(sex)을 통해서 소외와 고독을 해결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가 내린 결론은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단지 운명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었다. 예수께서 수가성 야곱의 우물에서 물을 긷던 여인에게 “지금까지 네가 추구해온 것들이 일시적으로 너를 만족 시켰을지는 모르지만 너에게 지속한 만족과 행복을 줄 수 없다. 그러나 내가 네게 주는 물은 네게 지금까지 추구하던 것과 달라서 이 물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고 하신 것처럼 인간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참된 만족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고갱은 하나님을 떠나 다른 것에서 만족을 찾으려 했다. 그리고 결국 그가 찾고자 한 것은 얻지 못한 채 고독하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
영문 초록 | Without doubt, Gauguin has had a great impact on modern art. Having become a professional artist at the late age of 35, he is regarded as one of the pioneers of modern art. At the end of the 19th Century, Impressionism was the dominant force in art. They emphasized the objectivity of art rather than its subjectivity, believing that the purpose of the artist was to represent nature as it appears to the eye. In contrast, Gauguin believed that the essence of art was not to simply represent nature objectively but rather to express one’s subjective interpretation of nature. Gauguin’s philosophy and his resulting work inspired others to follow in his footsteps. Gauguin’s work also stirred great debate. Some hailed him as a pioneer. Others, such as Griselda Pollock criticized his art as being colonialist and chauvinistic. Charles Morice pointed out the hypocrisy of the middle-class and the sexual debauchery of the European man that was presented in Gauguin’s work. Some critics consider Gauguin’s work as being religious paintings due to his frequent use of religious imagery. In Gauguin’s time, the use of religious imagery in art was very rare. Seeing this, Thomas Buser argued that Gauguin, despite the fact that he had great moral problems in his life, was a spiritual man. Similarly, Bradley Collins points to Gauguin’s teenage education at a Catholic school and argues that it had a significant influence in his art. Sister Wendy Beckett views Gauguin’s ‘Vision After the Sermon’ as an expression of his experience of religion. However, I do not completely agree with such interpretations of Gauguin’s work. The fact that someone uses religious imagery does not mean that his painting is a religious painting. It is indeed also possible to use non-religious imagery in order to convey a religious message. Therefore, it is a stretch to say that Gauguin’s work is religious merely because he uses religious imagery. There is a lack of a religious message in his work. Rather, Gauguin uses religious imagery simply to express his anger and despair at his unappreciated art. |
키워드 | 고갱, 기독교예술, 기독교적 이미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