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본 고대 유대교 문헌과 근현대 예술에 나타난 창세기 22장의 이삭 번제의 이미지에 관한 연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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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제목 | |
저자 |
오성호 (총신대학교 조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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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01] 오성호(논문+논평) 성경신학적 관.pdf.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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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구분 | 일반논문 | 인문과학
발행 기관 | 춘계학술대회 |
발행 정보 | (통권 23호) |
발행 년월 | 2016년 05월 |
국문 초록 | 본 연구는 창세기 22장의 이삭 번제 사건이 신구약 정경 안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와 고대 유대교 문헌 및 근현대 문화 속의 예술 작품(이미지)에서 어떻게 표현되었는지를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연구한다. 창세기 22장의 이삭번제 이야기는 나이 많아 인간적으로는 아이를 낳을 수 없었던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씨(후손)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시고 약속대로 이삭을 주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을 향한 그의 믿음이 어떠한지를 시험하시기 위하여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한 명령에 대하여 아브라함이 순종하는 이야기이다. 구약 안에서 이 이야기는 인접문맥으로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씨(와 땅)에 관한 약속을 주시고 성취해 가시는 창세기의 아브라함 사이클 속에 위치해 있으면서, 아브라함의 개인적인 신앙 여정에 있어서 가장 절정의 순간으로서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갖게 된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을 드러낸다. 원접 문맥인 창세기 전체의 맥락에서는 아브라함의 씨인 이삭은 타락 후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성취의 과정이라는 점에서 원시 복음과 관련을 가지는 구속사의 맥을 형성하며 그리스도에 대한 기대를 갖는다. 신약은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아끼지 않는 아브라함을, 사랑하는 독생자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나님에 대한 모형으로 인식한다(롬8:32//창22:12, 16; 막1:11, 요3:16//창12:2). 십자가를 지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요19:17)은 이삭이 나무를 지고 가는 모습을 반영하듯이, 이삭의 순종은 신약의 그리스도의 순종을 예표한다. 또한 이삭이 아브라함의 씨였던 것처럼 모든 신자들은 아브라함의 씨이며 믿음의 자손들이다. 그러므로 이삭은 믿는 자들에 대한 모형이기도 하다. 이삭은 번제로 드려지는 순간에 구출되고 대신 숫양이 번제로 드려졌으므로, 숫양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그리스도의 모형이고, 이삭은 제단에 올라가는 데까지만 그리스도의 모형이며 그 후에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해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형이다(롬9:7-8, 갈4:28). 신약은 또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자신이 제물로 드린 이삭을 살리실 능력이 있다고 믿었음을 증언한다(히11:17-19, 롬4:16-25). 부활 주제가 나타나는 고린도전서 15:4의 “사흘 만에”도 창세기 22:4(제3일에)을 상기시킬 수 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기로 결심하고 길을 나선 것이 (예기된) 이삭의 죽음을 의미한다면 제3일에 모리아 산에서 이삭이 구출 받은 것은 그 죽음에서 부활한 것과 유비적으로 일치하기 때문이다. 또한 야고보서 2:21-23은 아브라함의 순종이 그의 믿음의 결과 당연하게 나타나는 믿음의 행위였음을 강조한다. 이는 신약이 아브라함을 믿음과 순종의 모델로서 제시하는 것이다. 유대 문헌에서는 후대로 갈수록 아브라함보다는 이삭에 더 초점을 맞추어 이삭의 자발성과 순종뿐만 아니라 그의 순종에 대한 보상이 강조되는 경향이 있으며, 이삭을 이스라엘의 구원을 가져오는 일종의 메시야적인 인물로 보려는 경향이 나타난다. 고대의 유대교 문헌에는 종종 창세기 기사에는 없는 내용이 포함되곤 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는 것은 종종 사탄의 충동에 의한 것으로 나타는데(쥬빌리, 위-쥬빌리, 위-필로), 이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고 윤리성을 변호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유대 문헌에서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릴 장소가 어디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찾아가는 과정을 기술함으로써 창세기 기사보다 좀더 상세하게 주해하고 있다(쥬빌리, 요세푸스, 위-조나단). 유대 문헌에서는 창세기 기사와는 달리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그가 번제로 드려질 것을 고지하는 내용이 포함되기도 하고(요세푸스, 위-필로, 네오티피), 이삭은 그것에 따라 자신을 잘 결박하라고 요청하든지 기꺼이 번제로 드려질 것을 결심하는 내용이 나타나기도 한다(요세푸스, 위-필로, 네오티피, 위-조나단). 아브라함의 고지나 이삭의 동의 혹은 결박의 요청은 이삭의 자발성과 순종을 강조하며 이삭의 역할을 극대화한다. 이삭의 나이가 창세기 기사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유대 문헌 중에는 요세푸스에서는 25세, 위-조나단 및 네오티피에서는 37세 등으로 나타나는데, 후대로 갈수록 증가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 또한 이삭의 자발성 및 그의 역할의 중대성을 함축하며, 아들을 번제로 바치는 아브라함의 윤리적 책임을 경감한다. 또한 유대 문헌은 아브라함 혹은 이삭의 순종에 대한 보상을 강조하여, 이삭의 구출이 아브라함의 순종의 대가로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이해하거나(필로), 아브라함의 순종에 대한 보상이 요청되거나 약속된다(요세푸스, 위-필로, 네오티피). 유대 문헌은 종종 이삭을 순교자의 모형으로 보며 이삭의 순종이 순교를 격려하는 것으로 사용된다(제4마카비서와 위-필로). 또한 유대교 문헌은 종종 이삭의 피와 재 혹은 죽음을 언급하면서 이삭이 사실상 번제로 드려졌다는 가정 하에 미필적 이삭 번제에 이스라엘의 속죄와 구원을 위한 능력을 귀속하려는 경향이 후대로 갈수록 두드러진다(위-필로, 메킬타, 미드라쉬 하-가돌, Exodus Rabbah). 심지어 이삭은 부활의 전형으로서 죽은 자의 부활에까지 그의 공헌이 효력을 가져온다. 또한 이삭 번제가 유월절과 연결되거나(Exodus Rabbah), 종말론적 구원의 상징인 쇼파(Shofa)와 연결되거나(Genesis Rabbah), 신년 축제와도 연결된다(Leviticus Rabbah). 후대에는 이삭이 여호와의 종으로 언급되기도 한다(탈굼). 말하자면 이삭은 유대교에서 종말론적 구원의 완성을 가져오는 메시야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근현대의 화가들 중에서 사실주의와 심미주의를 융합하는 바로크 미술의 선구자인 카라바조는 중세 말기/근대 초기의 카톨릭 세계의 화가로서 테네브리즘(명암법, 키아로스쿠로)의 창시자이며 빛의 대가였다. 매우 사실적이며 생동감을 주는 그의 <이삭 번제> 그림에서 혁신적인 점은 천사가 지상에 내려와 아브라함 곁에 서 있음으로 인해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 혹은 거룩과 세속의 만남을 표현하며, 가난한 자들과 속된 자들에게도 거룩이 속할 수 있음을 표현한다. 또한 그의 그림의 가장 두드러진 핵심점은 이삭이 입을 벌리고 겁에 질린 채 비명을 지르는 듯한 모습인데, 이는 그가 인간의 내면의 고통과 죽음에 대해 매우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음을 말해주며, 이것은 그가 어린 시절의 상처와 가난으로 인해 내면적인 불행을 간직하고 살았던 경험 때문인 것으로 이해된다. 또한 그의 그림은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서의 이삭의 모습을 묘사하는데, 이것은 이삭 곁에 있는 숫양이 그의 다른 그림 <세례 요한>에서 동일한 숫양으로 나타나서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카라바조는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서의 이삭에 대한 그의 신앙을 그림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화란의 개혁주의적 전통을 가지고 있는 렘브란트는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은 명암법(키아로스쿠로)의 대가로서 칼빈적인 심미주의를 담아내는 개혁주의적 미술의 길을 열어놓은 화가이다. (그의 <이삭 번제> 그림에서도 카라바조의 영향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의 그림에서는 떨어지는 칼이 강조되어 적절한 천사의 개입으로 도살이 중지되는 순간을 포착하면서 백성들의 위기의 순간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구원을 강조한다. 렘브란트의 그림은 이삭을 이상적으로 표현하며 이삭이 그리스도의 모형임을 믿는 그의 신앙을 드러내고 있다. 얼굴이 없는 전형으로서의 인물인 이삭은 그리스도와 같이 흠이 없고 완전하며, 그리스도와 같이 순종적이며, 신적인 광명을 가장 많이 받아 영화롭게 된 몸을 가진다. 렘브란트의 그림에는 숫양이 누락되었는데, 이는 이삭이 숫양임을 함축한다. 러시아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난 샤갈은 신비주의 유대교의 영향을 받았던 화가로서 반유대교적 정서와 특히 나치체제하의 압제로 인해 유대인들이 학살과 핍박 및 차별과 고난을 당했던 것을 경험해 왔다. 샤갈의 <이삭 번제> 그림은 이삭이 이미 해를 당했음을 표현하고 있다. 샤갈의 이삭은 편안하게 누워 있으나 하체에는 피(도살)와 불(번제)을 상징하는 붉은 색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또한 천사를 보면서 당황하고 혼돈하고 있는 아브라함의 모습은 이미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을 완료했음을 함축하며 아브라함 자신도 불이 타는 듯이 붉은 색으로 칠해져 있기 때문이다. 또한 샤갈의 천사는 아브라함의 행동을 저지시키기에는 너무 늦었으며 소극적이고 무능력한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유대인으로서의 샤갈은 이삭 번제의 구속사적 의미에 관심이 없으며 예수 십자가 표상을 유대인들이 고난을 당하는 것에 대한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이삭 자신도 대속을 이루는 그리스도의 예표로서가 아니라 유대인들의 고난당함에 대한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다. 샤갈 자신은 그런 유대인들의 고난에 대한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으로 인해 자책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하실 것에 대한 소망을 그림에 표현하고 있다. |
영문 초록 | |
키워드 | 이삭 번제, 아케다, 창세기 22장, 이미지, 기독교 미술, 고대 유대교 문헌, 근현대 예술, 예술 비평, 성경 신학(Sacrifice of Isaac, Aqedah, Genesis 22, Image, Christian Art, Early Jewish Literature, Modern and Contemporary Art, Art Criticism, Biblical Theolog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