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윤동주 십자가에 나타난 실존적 자기완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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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제목 | |
저자 |
배지연 (한국실존연구소 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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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 02] 배지연(논문) 운동주의 십자가에 나타난 실존적 자기 완성.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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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구분 | 일반논문 | 사회과학
발행 기관 | 춘계학술대회 |
발행 정보 | (통권 23호) |
발행 년월 | 2016년 05월 |
국문 초록 | 본 논문의 목적은 윤동주(1917-1945)의 <십자가>를 통해서 한 인간의 깊은 자기인식과 진정성 있는 삶의 의미와 가치 실현을 실존적으로 고찰해보는데 있다. 윤동주의 <십자가>는 그의 시를 시대적으로 구분할 때 ‘후기시’로 분류된다. 이것은 1939년 9월 <자화상>을 쓴 이후 1여년의 창작 상의 공백기를 두었고 1940년 12월에 <팔복>으로부터 시작해 <십자가>등의 작품에 이전에 보이지 않던 시인의 실존적 고뇌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의 후기 시작은 한결같이 죽음, 어두움, 공포 등의 실존적 주제를 내포하고 있지만 <십자가>는 어느 다른 시작보다 시인의 실존적 고뇌와 실존적 자기완성에로 나아가는 삶을 밀도 있고 긴장감 있게 보여준다. 시인 윤동주는 조국이 일본의 식민지 지배하에 있던 시절에 태어나 조국의 해방을 반년 남짓 앞둔 1945년 2월 16일에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2005년 2월 23일에 윤동주 사망 60주기를 맞아 일본 <니시니혼 신문>에 윤동주 시인이 삶을 돌이켜보며 한일 양국의 우호관계가 깊어지길 염원하는 사설이 실렸다(야나기하라 야스코, 2015). 2015년에는 월간중앙이 광복 70주년과 윤동주 사후 70년을 맞아 윤동주 정신에 대해 특별기획을 실었다. 2016년 올해는 영화관에는 ‘동주’가 상영되었고 서점에는 ‘하늘과 바람과 시’를 찾는 독자가 늘고 문화극장에는 시인의 노래극이 ‘별을 스치는 바람’이라는 무료로 공연이 되었다. 이와 같은 윤동주 시인에 대한 열풍 현상은 그의 죽음이 남긴 생명력의 역설로 이해해도 무방할 것이다. 시인은 단지 독립운동가로서 옥사를 당한게 아니다. <십자가>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죽음은 십자가에서의 죽음이며 그것은 곧 실존적 자기를 죽이고 신앙적 자기로 태어나는 죽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흘린 피는 그의 바람대로 후대인들의 마음 속에 희망과 사랑의 꽃으로 피어나고 있는 것이다. 시는 크게 두 단락으로 나누어 분석한다. 전반부에는 시인의 자기 긴장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모습이 보인다. 지금까지 햇빛처럼 쫓았던 가치가 자기 힘으로 오르지 못하는 첨탑과 같은 높은 것에 올라가야만 추구하게 되었다. 따라서 쫓던 것을 포기할 수 없는 시인의 갈등이 고조되어 나타난다. “쫓아 오던 햇빛인데 / 지금 교회당 꼭대가 /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 높은 /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는 신의 구원에 대한 회의와 좌절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그러나 인류 구원을 앞두고 예수의 간절한 기도를 염두할 때 시인의 노래는 너무나 인간적인 실존적 긴장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좌절의 완화적인 표현이고 존재의 망설임으로 볼 수 있다. 후반부에는 시인이 잠정적인 자기완성에 이르기 위한 결단을 위해 신의 도움과 허락을 구하는 장면으로 구성된다.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 모가지를 드리우고 /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후반부는 “괴로웠”지만 “행복한”사나이로 묘사되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시인 자신도 신의 희생에 참여하여 죽음으로 삶의 영원성을 확장하고자 하는 기도를 올린다. 이와 같이 <십자가>를 통해 시인은 신에 참여하지 않는 자기는 자기가 없는 무(nothing)임을 명시한다. 그래서 필연적인 유한성의 운명을 넘어 무한한 가능성의 삶을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활용하여 신에게 자기를 맡기며 선택을 통해 자기 완성에 이르려는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 |
영문 초록 | |
키워드 | 윤동주, 십자가, 실존적 자기완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