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초지능, 초연결, 소통을 목표로 한 4차 산업혁명 신기술이 폭발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이 시대에, 역설적으로 ‘말’은 우리 사회에서 철저히 굴욕을 당하고 있다. ‘천렵질’, ‘달창’, ‘적폐(積弊)’ 등과 같은 험한 말은 당연히 일차적으로 ‘말하는 자’의 잘못이다. 문제의 심각성은, 내년 총선을 겨냥하여 자신을 부각시키고, 어떻게든 공당의 공천을 받으려는 한 줌도 안 되는 정치인들만이 막말을 쏟아 내는 것이 아니란 점에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도, 말을 할 때 뇌를 거치는 이성적 성찰을 배제하고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을 하고 산다. 이런 식의 ‘말’은 필연적으로 ‘말’과 ‘말한 사람’과의 완전한 분리를 가져온다. 다시 말해 ‘말하는 자’와 ‘말’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끊어졌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단절된 ‘말’ 속에는 ‘말하는 자’의 삶의 무게와 그 자신의 인격이 전혀 실리지 않게 된다. 또한 그 속에는 어떤 진지함이나 진실이 담겨있을 수 없다. 그런데 자신의 ‘말’ 속에 자신의 인격과 삶이 들어 있지 않는 ‘말’을 어떻게 인간의 ‘말’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심하게 말하면, 이런 ‘말’은 그냥 ‘소리’이며, ‘잡음’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비록 이 ‘말’이 대중매체를 통해 주목받는다고 할지라도, 그 ‘말’은 완전히 익명의 소음이며, 그 ‘말’에 사용된 어휘와 표현들은 그 어떤 의미도 갖지 않은 ‘구호’이고, 스쳐지나가는 ‘바람’일 뿐이다. 다시 말해 기표(記標, 시니피앙), 기의(記意, 시니피에), 지시대상, 함의로 채워진 사람의 ‘말’이 텅 비워졌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말’ 속에는 의미를 담을 필요도 없고, 의미를 싣기도 어렵다. 그래서 이런 ‘말’은 너무도 쉽게 ‘이즘’(ism), ‘교리’, 대의명분, 경제적 이익을 위한 ‘선전’(propaganda)에 동원된다.
오늘날 ‘말’이 심각한 것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이러한 막말을 차지하더라도, 일상적인 언어 속에도 사람의 인격과 삶이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말’과 ‘말하는 자’의 단절이 일상적인 ‘말’조차 벌거숭이로 만들고 있다. 그래서 우리들은 아무것도 ‘말해야 할 것’이 없으면서도 끊임없이 말하고, 말하며, 듣고 또 듣고 있다. 이제 일상 속에서 인생의 진리를 찾고자 시와 역사와 철학을 말하거나,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정보와 가르침을 교환하거나, 세상을 분석하려는 의식과 성찰의 내용을 말하는 것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그 결과 ‘수다’와 다를 바 없는 쓸데없는 말하기, 사건을 도식화하거나 왜곡하여 의미와 진실성이 결여된 말하기가 우리의 일상과 대중매체와 심지어 교회까지도 채우고 있다. 넘쳐나는 정치담화들과 전혀 연속성이 없는 뉴스들과 수많은 강연들과 심지어 설교들 속에도 진정으로 ‘말’되는 어떤 것을 찾아보기가 드물다. 오직 병적인 ‘수다’, 현혹하는 무의미한 단어의 포장, 깊이가 전혀 없는 단순한 자료와 분석들, 치밀한 ‘선전’들만이 펼쳐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는 귀를 기울여 흘러가는 ‘말’을 들을 필요가 없게 되었고, 타인의 말을 경청하지 않는 습관이 우리 문화 속에 깊이 배였다.
하지만 성서에서 보여주고 있는 ‘말’은 철저히 인격과 통합된 ‘말’이다. 즉 그 인격이 진실하면 그 ‘말’ 역시 진실하다는 의미이다. 가장 모범적으로 보여준 사례가 그리스도 자신이다. 만약 예수의 말들이 자신의 인격과 분리되었다면, 그의 말과 성서 자체는 그 어떤 진실도, 가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 속에는 ‘말’과 진리에 대한 인식과 행동과 모든 인격적 관계가 완전히 통일되어 있다. 이런 분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마12:36)라고 말씀하신 것은 오늘날 매우 심각히 받아들여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는 우리의 말에 의해 우리가 의롭다 여김을 받을 것이고, 우리의 말로 인해 우리는 단죄를 받는다는 것이고, 우리는 언젠가 그리스도 앞에서 우리의 온갖 헛된 ‘말’을 해명해야만 한다는 경고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고 때문이 아니더라도 ‘말’은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참으로 중요하다. 하나님 자체가 스스로 ‘말하시는 분’이시며, 그리스도 역시 ‘말’로 존재하셨다가 육신이 되신 분이시고, 삼위일체 하나님이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선택하신 방법이 바로 이 ‘말’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말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증언하는 자이고, 동시에 인간의 ‘말’을 회복시켜야 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말’ 속에는 하나님의 ‘말’이 투사되어야 하고, 자신의 ‘말’속에는 자신의 인격이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표현되도록 해야 한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말’은 이 세대가 지껄이는 고착된 언어가 아니며, 인간적인 익숙함과 소유를 거부하는 생생히 살아 있는 ‘말’이어야 한다. 이제 기독교세계관 학술동역회의 새로운 기관지, <신앙과 삶>이 오랜 논의 끝에 새롭게 출발하게 되었다. 아무쪼록 동역회의 새로운 기관지가 자가생산적이고, 자주적이며, 독립적인 하나님의 ‘말’을 투영하는 자유로운 ‘메아리’와 ‘반향(反響)’이 되길 간절히 바란다.
※ 본 글의 제목은 자끄 엘륄(Jacques Ellul)의 저서 <굴욕당한 말>(La parole humilliée)』(대장간, 2014)에서 가져온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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