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이 글은 지난 5월 29일 서울대 종강예배(학생회관 2층 라운지)에 있었던, <누가 포스트모더니즘을 두려워하는가?> 등의 저자로 국내에 잘 알려진 미 칼빈대학 기독교 철학 교수 제임스 스미스(James Smith)의 “You are What You Love : University as a Place of the Worship”라는 특강에 대한 리뷰이다. 제임스 스미스는 최근 고려대 2019 베리타스 포럼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해서, 이 번 특강 이외에도 고려대(5월 28일), 성복중앙교회(5월 30일), 삼일교회(5월 31일)에서 일정을 소화하였다.
생각하는 것으로 인간은 살지 않는다. 우리 모두는 열망하는 존재로서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열망을 재현하는 존재이다. 내면화된 사랑의 구조와 질서야말로 전인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을 구성하는 기제이며, 바로 이것이 “무엇을 생각하느냐”보다 “무엇을 사랑하고 열망하느냐”가 훨씬 중요한 이유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사랑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무엇이 우리의 열망을 주조하고 강화시키거나 변형시킬 수 있을까?
바로 ‘종교’이다. 종교는 그저 교리나 신념체계의 나열이 아니다. 종교는 ‘삶의 방식’이며 우리 삶을 지배하는 실천과 의례, 곧 ‘예전적 리듬’(Liturgical rhythm)으로서 우리의 사랑을 형성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예배는 단지 종교기관이 수행하는 의식에 불과한 것이 아닌,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을 향한 지향이며, 헌신의 방향을 투영하고 그것을 강화시키는 예전적 촉매가 된다. 따라서 종교는 우리의 사랑과 열망을 다루는 모든 것을 총칭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종교를 인지적인 신념과 가치, 기관 위에 위치시켰을 때는 종교에 대한 부분적이고도 피상적인 이해에 그칠 수밖에 없다. 종교의 영향은 머리뿐만 아니라 몸까지, 인지뿐만 아니라 정서까지를 포괄하기 때문이다. 종교의 의례는 그 종교가 지향하는 열망, 사랑, 헌신, 가치관, 정체성을 ‘체현하고’(embody)하고, 종교적 존재인 모든 인간은 예전을 통해 내면화된 사랑의 구조를 실천함으로써 그것을 ‘재현한다’(represent)한다고 할 수 있다.
종교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근대적 사고방식이 규정하고 범주화한 종교의 범위를 획기적으로 넓힐 것을 요청한다. 우리 일상에 늘 함께하는 거의 모든 것들은 종교적인 힘을 가지고 우리 일상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중이다. 스포츠, 소비주의, 교육체계, 모바일 테크놀로지는 가장 강력한 종교의 예시들이며 각기 경기장, 백화점, 대학교, 핸드폰은 각각의 고유한 예전적인 리듬을 사용하여 사람들의 열망과 사랑을 특정한 방향으로 질서 짓고 강화시키는 종교기관들이다.(경기장은 국가에 대한 사랑을, 백화점은 돈에 대한 사랑을, 대학은 성공에 대한 사랑을, 핸드폰은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을 고양시킨다) 따라서 종교로부터 자유로운 현대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복수의 종교기관들 안에, 종교기관들과 더불어 살고 있다. 종교는 일상과 무의식에 혼재한다. 오늘날과 같은 21세기에는 테크놀로지와 미디어, 전지구화의 영향으로 혼재의 양상은 날로 더욱 복잡하고도 두텁게 펼쳐지고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21세기를 신실하게 살아내기 위해서 ‘문화에 대한 예전적 분석’을 해야 하는 이유이다. 즉, “이 의례들과 예전은 무엇을 사랑하라고 가르치는가?”, “나도 모르게 나를 형성하고 있는 예전들이 있지는 않은가?”라는 질문들을 던지고, 스스로 살펴야 한다. 우리 모두가 속한 종교기관인 대학은 어떠한가? 교육기관인 대학은 스스로 비종교적 기관을 표방하지만, 은밀한 방식으로 그 구성원들이 무엇을 사랑하고 열망해야 할지를 가르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강력한 종교기관이다. 대학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사랑하게끔 하는가? 대학은 은밀하고도 무의식적인 방식으로 나를 어떻게 형성하고 있으며, 내게 어떤 감정을 일으키고 어떤 실천을 하게 만들고 무엇을 열망하게 만드는가?
이에 각자 나름대로의 답을 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 대학생들에게 맡겨진 역할이자 책임일 것이다. 예전적 분석을 수행함으로 스스로를 살필 뿐만 아니라, 왜곡되고 어그러진 사랑과 열망의 구조를 재형성함으로 다시 바르게 질서 짓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성화의 삶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질문을 던져본다. 이곳 서울대학교 대학원은 나로 하여금 무엇을 사랑하게 만들었는가? 20대 절반을 보낸 신학대학을 떠나, 관악에 발을 디딘 첫 학기가 떠오른다. 일주일에 나흘 정도는 열등감 속에서, 사흘쯤은 무력감 속에서 지내고 하루도 빠짐없이 피곤했던 나날들. 그 우울감과 외로움, 그리고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들.
“대학원생들은 다 그래,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랑 비교하지 말고 네 페이스대로 우직하게 가야 해, 안 그러면 우울증 걸려.”라던 한 선배의 말이 그렇게 위로가 됐는데, 내가 받은 새 힘과 위로의 실마리는 ‘내 페이스’라는 말 속에 있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그 선배는 다른 의미로 말했겠지만, 적어도 내게 ‘내 페이스’라는 것은 나를 이곳에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을 기억하는 것이었다. 이 모든 유해하고도 격정적인 정서들은 지독한 나에 대한 사랑, 그러니까 ‘남과 비교해서도 뒤처지지 않는 나에 대한 사랑’이라는 질병의 증세였음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던 것 같다. 나에게 서울대학교 대학원은 나도 모르게 나를 사랑하고, 지독히도 나를 열망하게 하는 종교기관이었던 것이다. 내 페이스를 회복함으로써, 즉 하나님을 주목하고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만 치유될 수 있었다는 것을 이제 이해한다. 이곳에서 나도 모르게 걸렸던 어떤 병의 정체와, 나도 모르게 받았던 예기치 못한 치유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이제는 선명하게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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