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생각해 보니 항상 문제는 일이었다. 나는 잘 살고 있을까? 라는 물음에 삶을 돌아볼 때, 사실 내가 돌아보는 건 내가 아닌 내가 했던 일이었다. 세계관에 대한 강의를 듣기 위해 광주에서 서울까지 올라간 것도, 질문을 하다 울음이 터진 것도 내가 아닌 내가 하고 있는 일 때문이었다. 하루 8시간, 내 삶의 절대적인 비율을 차지하는 일은 단순한 ‘일’이라고 넘기기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일이 곧 소명이고, 삶이 예배라고 배웠기에 더욱 그랬는지 모른다. 문제는 바로 그 일이, 일을 하게 된 순간 내 주도권을 벗어난다는 것이다. 오히려 일이 나를 선택하고 결정하게 된다. 일과 나의 세계관이 충돌하는 순간 고민이 시작된다. “내 일이 향하는 방향은 어디인가”, “이 일은 나를 어디로 인도하는가”, “내 일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그리고 “나는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가?”
총신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고 멕시코 한인교회에서 1년 3개월, 에콰도르 선교지에서 3개월, 한국에 돌아와 비영리단체에서 1년 6개월 그리고 도시재생 현장지원센터에서 2년째 일하고 있다. 특별히 하고 싶은 일이 있어 이직을 한 것은 아니다. 단지 주어진 상황에서 해야 하는 일을 하다보면 배워야 할 것들이 생겼고 그에 맞춰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내게 해야 하는 일이란 ‘이웃 사랑’이었고, “불평등한 세계체계에서의 사회참여”였다. 쓰고 보니 너무 거창한 것 같지만 원래 방향이란 게 그런 것 아닌가.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마다 니콜라스 월터스토프(Nicholas Wolterstorff)의 <정의와 평화가 입 맞출 때까지>를 보며 이력서를 썼다. 세계 형성적 기독교를 생각하며 교회에 갔고, 정의에 대한 굶주림을 위해 선교지에 있었다. 굶주린 자에게 빵을 주는 방법을 배우고 싶어 비영리단체에 갔고, 기쁨의 도시를 꿈꾸며 도시재생 현장지원센터에 왔다. 일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바는 분명했다. 하지만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 갈등은 찾아왔다. 나는 잘 살고 있는 걸까?, 내가 하는 일은 옳은 일일까?
현재 내가 하는 일은 국토교통부의 사업인 도시재생 뉴딜사업을 현장에서 지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근무지의 이름도 도시재생 현장지원센터이다. 도시재생 뉴딜사업은 우리나라의 도시정책이 재개발·재건축에서 도시재생으로 변하면서 시작된 국토부의 사업 중 하나이다. 국가 정책에 의한 사업이기에 방향과 목적이 분명하다. 도시재생 활성화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에 의해 수립된 ‘국가도시재생 기본방침’, 국토교통부에서 작성한 ‘도시재생 뉴딜사업 가이드라인’, 이것이 일터에서 내게 부여된 방향이자 지침이다. 처음 일을 시작할 무렵 도시재생의 방향과 내 삶의 방향이 그리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쇠퇴한 곳에 활력을 불어넣는 것, 지역공동체를 회복하는 것, 이를 통해 삶의 질을 높이는 것, 도시재생이 ‘샬롬’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방법인 것 같았다.
하지만 도시재생 현장지원센터에서 일하는 2년 동안 도시재생을 알아갈수록 부딪히는 지점이 늘어갔고, 나를 제약하는 것은 일의 방향만이 아니었다. 실력이 부족한 나를 포함하여 결정권을 가진 상급자, 함께 일하는 동료, 어쩔 수 없는 현장의 상황 등, 구체적으로 설명할 순 없지만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게 너무나도 적은 상황에서 어쩔 수 없다며 진행한 일들이 쌓여만 갔다. 현장에서 내 방향과 다른 무언가를 해야 할 때 김남주 시인의 ‘어떤 관료’가 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의 끝이 어디인가? 나는 그 일에 어디쯤 서 있는가? 그리고 일터에서 나는 비그리스도인과 무엇이 다른가?
갑작스럽게 부탁받은 원고는 정리된 무언가를 쓰는 것이 아닌 쓰면서 정리하는 과정이었다. 그래서 쓰는 동안 질문만 늘었다. 가끔은 이러한 질문이 일을 그만두기 위한 변명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급쟁이 그리스도인으로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일과 나와의 관계 속에서 생긴 수많은 질문에 답해야 한다. 사실 이미 답을 알고 있는지 모른다. 내 일이 속한 영역에 대해 성경이 무엇이라 답하는지 찾는 것, 거기에 빗대어 내 일과 성경이 다른 점을 고민하는 것, 회복된 모습을 떠올리는 것, 그리고 그것을 삶에서 행동으로 풀어내는 것.
학창시절 그리스도인은 썩은 사과를 먹을 정도로 튼튼한 위장을 가져야 한다고 배웠다. 하지만 막상 일을 하면서 자의든 타의든 썩은 부위를 도려낸 적이 많았던 것 같다. 썩은 사과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썩은 사과를 먹기 위해선 먼저 썩은 사과를 알아야 한다. 무엇이 사과를 썩게 했는지, 썩은 사과를 먹으면 어떤 증상이 나타나는지 등, 제대로 알아야 제대로 대처할 수 있다. 지금부터라도 썩은 사과를 먹는 연습을 해야겠다. 언젠간 썩은 사과도 소화할 튼튼한 위장을 꿈꾸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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