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로이 클라우저 / 홍병룡 / 아바서원 / 2017
“저건 너무 종교적인 의견이지 않나요?” 라고 할 때, 무엇이 종교적이며 또 ‘종교적’인 것은 무엇인가? 객관적 학문인 것 같은 수학이나 물리학 등의 이론은 과연 종교적 중립성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이 책은 종교와 이론 간의 관계를 밝히면서, 어떤 이론도 종교적으로 중립적일 수 없음을 주장한다. 저자 로이 클라우저는 20세기 네덜란드의 철학자 헤르만 도예베르트(Herman Dooyeweerd)로부터 이어받은 이같은 통찰을 현대학문 이론들의 예시를 통해 논증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그렇다면 클라우저(Roy A. Clouser)가 정의하는 ‘종교’와 ‘이론’은 무엇인가? 먼저 그는 ‘종교’를 정의하는 중요한 키워드로 ‘비의존적’(non-dependent) 특성을 꼽는다. 어떤 본질적인 신적 존재는 다른 어느 것에 의존적이지 않은 특성을 지니며, 따라서 ‘종교적 믿음’이라는 것은 이 비의존적 실재를 믿거나, 비신적인 것이 어떻게 그것에 의존해 있는지에 대해 믿거나, 혹은 사람이 어떻게 그것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에 대한 믿음이다. 즉, 궁극적인 실재에 대한 믿음을 종교적이라고 표현한다. 한편 ‘이론’은 고도의 추상화 작업을 거친 가설의 유형을 말한다. 추상화라는 것은 어떤 속성 혹은 ‘양상’(aspect)을 추출해내는 과정인데, 이러한 작업을 통해 속성들 간의 관계를 파악하여 일련의 법칙을 찾을 수 있다. 이 특정한 양상들에 대해 연구한 것이 바로 과학 이론으로, 실재나 지식의 본질을 밝히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실재의 본질에 대한 모든 견해는 궁극적 실재에 대한 관념을 포함하거나 그것을 가정하고 있기 때문에, 이론은 종교적 믿음을 전제로 삼는다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종교적 믿음은 실재관을 규정하고, 어떤 실재관을 매개로 하여 간접적으로 이론을 통제하게 되는 것이다.
클라우저는 이같은 주장을 뒷받침하는 사례로 수학, 물리학, 그리고 심리학 이론의 경우를 들어 무엇을 신적 존재로 전제하는가에 따라 이론이 제의하는 것의 본질이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내재된 종교적 믿음이 어떤 가설의 범위를 제한하도록 하는 우선권을 부여하다 보면, 이론의 전제들을 포함한 실재의 본질이 그 믿음에 선호하는 양상으로 ‘환원’(reduction)된다는 점이다. 그는 이것이 우리의 경험에서 추출된 속성이나 법칙에 무조건적인 존재성을 부여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 즉 하나님이라는 초월적 존재에 그 절대적 존재성을 제한하지 않았을 때 나타나는 필연적인 결과임을 증명한다. 그렇다면 비환원주의적 실재론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는 비성경적인 종교적 믿음 대신, 성경적 창조세계를 바탕으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삼을 경우 나타날 수 있는 비환원주의 이론의 프로그램을 사회론과 국가론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결과적으로 클라우저는 이처럼 이론적 사유의 종교적 뿌리를 밝히는 일을 통해 과학이론 혹은 학문세계 안에서 종교적 중립성이 지켜지고 있다는 믿음들이 단순히 신화에 불과한 것이었음을 밝힌다.
이 책은 한 권만으로도 어떤 이론을 종교 중립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를 잠식시킬 수 있는 효과가 있다. 누구든 어떤 주장에 대해서 그에 내재된 가치관과 관점이 있을 것이라고는 예상하지만, 좀 더 실증적이고 양적인 문제를 다루는 학문분야에서는 종교라는 영역이 영향력을 미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 책에 따르면 그 어느 분야의 이론도 종교의 깔때기를 그냥 통과하지 못한다. 종교를 사적인 영역 혹은 선택의 문제로 치부해버리는 이 시대에, 사실은 최신의 과학 이론과 탈근대적 사고방식의 근저에도 종교적 믿음이 내재되어 있다는 통찰은 클라우저가 에필로그에 언급했듯 단순히 이론을 넘어서 실제적 삶의 모든 측면이 종교적으로 중립적이지 않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 사실을 밝히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가 왜 필요할 수밖에 없으며 성경적 논리에 입각한 이론체계가 어떤 면에서 더 정당성을 가질 수 있는지 까지를 변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만 앞으로 이러한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좀 더 구체적인 각각의 학문 분야에서 내재된 종교성을 밝혀내는 작업, 혹은 신앙과 학문을 통합적으로 해석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비록 클라우저가 여러 분야에 걸쳐 예시들을 들고 있지만 한 권의 책 안에서 여러 영역의 깊이 있는 내용을 다루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앞으로 각 전공분야의 이론 속에 녹아있는 비성경적인 관점을 인식하고 그 정당성을 지적하면서 자연스럽게 수정해나가는 작업이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의 과제라고 할 수 있겠다. 이를 통해 피조물을 절대자로 높이는 오류를 범하지 않고 명확한 진리의 체계 아래에서 학문적 발전을 도모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클라우저가 가리키는 방향성의 그림자를 따라 앞으로 제시될 비환원주의적 이론들의 출현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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