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번역: 김철수 (조선대 교수, 영문학, 학회이사)
이제부터 우리의 현재 생태계 위기에는 ‘인류세’(Anthropocene 人類世)라는 이름이 붙게 될 것이다. 이는 인류가 처하게 된 예기치 못한 상황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으로서, 인간의 활동이 완전히 성장한 지질학적 세력이 되어 우리가 새로운 지질학적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1. ‘인류세’의 역설들 : ‘인류세’라는 개념을 명확히 하는 것은 여러 가지 역설을 불러일으킨다. 그 이유는 역사상 처음으로 지질학적, 기후적 격변의 요인이 의식을 가진 존재가 되어, 자신의 상황을 생각하고 이를 명확한 언어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향후 지구의 미래를 그 손으로 이끌고 나갈 인간의 이러한 지위는 전대미문의 책임을 떠맡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절대적으로 절박한 맥락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상 기후, 빙하의 해빙과 해수면 상승, 만연된 미세오염, 삼림의 파괴, 돌이킬 수 없는 생물 다양성의 침해, 태평양에 조성된 플라스틱 대륙, 그리고 가까운 미래에 구체화될 돌이킬 수 없는 기후적 기원의 갈등에 직면해 있는 인류는 다음 같은 질문을 피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무덤 파는 사람이자 수호자의 역할을 하는 이 세상에 대해 무엇을 하기를 원할까? 우리는 전 지구적 규모로 인간의 인식과 행동이 변화하기를 바랄 수 있을까? 그 위기에서 탈출하는 길을 제시하기 위해 여러 가지 중심된 고찰들을 살펴보기 전에, 우리는 정확한 진단을 내리며 그 기원과 원인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2. 위기의 기원 : 1967년 린 화이트(Lynn White)의 유명한 논문 <생태계 위기의 역사적 기원>(The Historical Roots of Our Ecologic Crisis)이 발표된 이래로, 유대-기독교 전통은 종종 우리를 지탱해 주는 지구에 대한 부끄러운 착취라는 죄목으로 종종 비난을 받아왔다. 창세기 1장에 주어진 “정복하라”는 무제한적인 명령은 그 위기의 주요 매개체가 될 것이다. 인간의 활동이 지구상의 생명의 조건이나 생존의 조건을 황폐화하는데 미치는 영향은 우리로 하여금 창조와 새로운 창조에 대한 성경의 설명을 새롭게 읽도록 유도한다. 만일 우리가 문자 그대로의 해석을 모두 피하고, 각 텍스트를 그 맥락 속에서 재정립하고, 성경 전체의 내부적 논리를 파악하려 한다면, 성경적 계시를 율법과 복음, 사랑과 정의, 신앙과 사역 그리고 특히 지구를 지배할 자유와 하나님 앞에서 지구를 관리해야 하는 책임 사이의 영구적인 변증법 운동으로 간주하는 것이 신중하고 명확해 보인다. 이제 기독교와 인류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그러한 성경적 변증법은 서서히 무너졌고, 결국 단 하나의 긴장의 축만 남아 있게 되었다. 즉, 책임 없는 자유는 제약 없는 자유가 되고, 바로 그 때문에 자유의 반대인 절대적 필연성에 굴복하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성경적 변증법에 대해 충실하지 않음으로써, 아마도 현재의 위기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미래에 대한 책임이 있다. 왜냐하면 성경적 변증법을 쇄신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3. 쟁점과 출구: 프랑스의 법학자이자 사회학자이자 개신교 신자인 자크 엘륄(Jacques Ellul 1912~1994)은 우리가 위기를 탐색하고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새로운 윤리의 기본 축을 정의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인류가 길을 잃은 난국에 대해 현재 제시된 대다수의 해결책은 기술혁신의 잠재력을 강조한다. 즉, 지구의 구원은 기술의 과잉을 통해 실현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엘륄이 제안한 관점은 완전히 정반대이다. 그의 추론은 기술 현상과 기술사회를 지배하는 법칙에 대한 지극히 정교한 분석과 더불어 시작된다. 엘륄에 따르면, 기술의 특징 중 하나는 양면성이다. 기술은 그 자체로 선하지도, 악하지도, 중립적이지도 않지만, 항상 그리고 필연적으로 인간에게 긍정적이면서도 해로운 효과를 창출해 낸다. 따라서 생태계 위기를 해결하려고 기술을 맹목적으로 신뢰하는 것은 결국 그 해결책과 그 원인을 혼동하게 될 것이고, 차례로 재난을 형성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모든 기술적 문제에 대한 모든 기술적 해결책 자체가 양면적이기 때문에, 그것은 차례로 계속해서 기술적으로 한발 앞선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기술사회를 지배하는 법칙은 헝가리 물리학자 데니스 가보르(Dennis Gabor 1900~1979)가 표현한 법칙이다. 즉, “기술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모든 것은 반드시 그렇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유한한 세계에서 무한한 성장을 할 수 없다”는 엘륄의 주장에 동조한다면, 가보르의 법칙이 지닌 실증주의의 한계를 넘어설 것이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반드시 행해질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 결정론에도 종속되지 않는다. 자기 제한의 능력은 인간의 존엄성을 나타내는 표시이다. 우리는 살인을 금지하는 율법에서 이것의 상징적 예를 발견한다. 이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이며, 바로 성경적 변증법에 의거한 새로운 거부 행위이다. 엘륄이 가진 힘과 능력을 쓰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인 ‘비무력(非武力 non-power)의 윤리’를 제시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윤리는 ‘힘’, ‘무능력’, ‘비무력’이라는 세 가지 항목의 변증법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본래 힘과 능력이 없는 ‘무능력’과 거리가 먼 ‘비무력’은 할 수 있는 가능성인 동시에 하지 않겠다는 의식적이고 이성적인 선택이다. 기독교 윤리는 ‘자유의 윤리’일 뿐 아니라, 전능한 존재이나 자신의 무한한 힘을 사용하지 않은 예수 그리스도를 충실히 따르는 ‘비무력의 윤리’이다. 예컨대, 예수 그리스도가 체포되던 순간에 천사들의 군단을 부르기를 포기했을 때이다. 이제, ‘인류세’는 전능한 인간의 시대, 즉 자멸에 이르는 무제한의 힘의 시대이다. 따라서 가보르의 법칙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은 엘륄의 기독교적 생태계 보호를 열 수 있는 결정적인 해석학적 열쇠가 될 것이다. 그것은 명철함, 지혜, 절제가 존재하는 곳으로의 길을 열어준다. ‘인류세’의 도발과 기후 위기의 도전, 특히 구체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 극도의 절박함에 직면한 상황에서 엘륄은 우리를 비관주의도 낙관주의도 아닌 소망으로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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