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할아버지 때 시작한 농장에서 가업을 이어 40년 가까이 농사를 짓고 계시는 아버지는 종종 농부라는 직업이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자연과 그 섭리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볼 수 있는 직업이라고 말씀하시곤 하셨다. 농장에서는 유기농 고구마, 양파 등의 농산물이 생산되고, 동백꽃과 수선화가 만발하는 4월마다 그 뜻을 기념하기 위해 축제가 열리며, 도시민들이 찾아와 소소한 농사거리와 농촌살이를 체험할 수 있다. 나에게 있어 농장은 경제 논리에 입각해 운영되는 산업 현장이라기보다는 이 땅을 경영하는 농부의 철학과 인생이 담긴 삶의 터전이다. 여기서 나온 소출은 산업적 방식으로 대량 생산되어 마트에 진열되는 식료품과는 다른, 농부의 생각과 정성이 담긴 소중한 자산이다.
나는 자신의 터전과 일, 가꾸는 작물과 가축에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농사를 짓는 농부들을 존경한다. 한때 뉴욕대학에서 교편을 잡았으나 30대에 사직하고 고향에서 농사를 짓는 농부이자 시인인 웬델 베리(Wendell Berry, 1934- )는 이러한 삶을 바로 농업적 생활주의(agrarianism)라고 정리하였다. 그는 특히 인간이 땅에 뿌리를 박고 책임 있게 살아가야 한다는 토머스 제퍼슨의 주장을 바탕으로 ‘농업’과 ‘살림’을 연결하여 설명한다.
웬델 베리는 무엇보다 환원주의적 과학과 결정론적 경제학으로 농업을 설명하려는 시대의 흐름을 강하게 비판했다. 현대문명적 사고에 기반을 둔 산업주의(industrialism)는 가축과 작물을 ‘생명’이라기보다 ‘상품’이라는 프레임을 설정했고, 이 ‘상품’을 값싸게 판매하여 수익성을 최대로 높일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관심을 둔다. 그러나 자연과 사람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 농업의 구성요소는 기계 부품을 교체할 수 있는 것처럼 교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언제나 시장의 법칙에 의해서도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농업이란 오히려 정적이라기보다 역동적이며, 일방향적이라기보다 순환적인 것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정교하며, 의존적인 생태계 가운데 자리 잡은 농업은 개인과 농가, 지역 공동체에 유기적이고 상호적인 영향을 끼친다.
농업을 이해함에 있어 중요한 단서는 바로 농업과 관련된 생태계 안에서 생명과 살림(삶)의 방식으로 농업을 바라보는 것이다. 농업을 온 삶으로 인식하는 농부는 자신을 경작하는 땅에 대한 애정의 마음을 갖고 정성이 담긴 농사, 값진 소출, 믿을 수 있는 먹거리, 건강한 사람, 그리고 하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나아간다. 산업주의는 자본과 기술을 토대로 형평성과 윤리가 결여된 사적 이익을 추구하지만 농업적 생활주의는 지역과 토지를 기반으로 하여 이들의 관계를 통한 생태계를 관리하고 성장해나간다. 산업주의는 먹거리를 상업적으로 대상화하고 단순화하여 초국적인 자본 경제 구조를 형성하는데 집중했다면, 농업적 생활주의는 농업을 생명과 살림에 연결하여 가정과 지역에서 소비하는 지역 기반 자급자족적 패턴을 형성한다. 농업적 생활주의는 환원주의적 과학이 내놓은 산업주의적 농업의 프레임을 깨고, 농업을 우리의 의, 식, 주 등의 생활 방식으로 이해하는 시작이 된다.
나는 이러한 농업적 생활주의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회복하는 과정이라고 믿는다. 인간 중심적 사고에 기초해 조작된 농업의 개념을 다시 원 위치로 돌려놓는 것이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우선적으로 중시되었던 생산성이라는 획일적인 기준을 내려놓고, 자연과 공동체라는 포괄적인 기준으로 농업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가치를 매길 수 없는 것에 가치를 매기려는 행위로 인해 놓쳤던 그 본질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원이 실은, 우리가 만들어낸 산출물이 아니라 주어진 선물임을 인정하고 그것을 착취하기보다 돌보고 보살피려는 시각을 갖게 된다. 그것은 만물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고 그의 질서에 따라 운행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를 되살리려는 회복의 과정이다.
이렇게 농업과 살림을 연결하는 사고방식은 농사를 짓는 농부뿐 아니라 생명을 먹고 누리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필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창조질서의 회복하기 위한 과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우리는 농업에 대한 협소하고 고립된 프레임에서 나와 지역 생태계와 사회를 연결하는 삶의 양식으로써 농업을 인식할 수 있는가? 의, 식, 주 등 우리의 일상과 밀접하게 연결된 농업에 대하여 우리는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가? 농업인이 아닌 사람도 농업에 대해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소양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이러한 질문은 계속해서 풀어나가야 할 숙제이다. 아버지의 뜻을 따라 농업 교육을 전공하고 있는 나 또한 많은 사람들이 농업에 대한 가치를 깨닫고 농업적 생활주의를 실천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내 자리에서 창조세계의 질서와 회복에 동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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