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올해는 선선한 9월 정말 가을다운 가을에 한가위를 맞이하게 되었다. 한국의 기독청년들은 이 풍성한 한가위를 누렸는지 모르겠다.
“명절이란 산 사람들이 권력관계를 확인하는 자리” 라는 말이 한국 현대 사회를 풍미하는 표현이 될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을도 모자라 병이나 정쯤 되는 청년들에게는 잔소리만 풍성한 명절은 익숙하다 못해 넌더리가 날지도 모르겠다.
필자의 이야기를 잠깐 나누겠다. 올 1월에 결혼한 필자와 필자의 아내는 곱게 한복을 입고 세배를 하고 결혼 축하를 듣던 설날과 달리 이번 추석엔 “자녀는 언제쯤 생각하니?”와 “손자/손녀는 언제쯤 안겨 줄거니?” 뿐만 아니라 “피임을 하니?”와 ”남편이 적극적이지 않니?”라는 질문까지 들어야 했다. 아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의 신비를 선물해주시기 전까진 아마 계속 듣게 될 것이다. 아니 출산과 동시에 “둘째는…”의 이야기를 들어야 할 각오가 되어있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사실 우리나라만 유독 이런 참견과 비교 우위 확인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조금만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성경의 많은 대목들도 서로에 대한 비교우위와 참견을 보여주고 있다. 일례로 교회가 탄생하는 순간에도 직전까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던 베드로는 옆에 있는 요한에게서 눈을 때지 못하고 있는 장면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요 21:21)
통신의 발달로 자기표현의 수단이 많아진 우리는 온라인/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우리의 모든 순간이 누군가에게 보여 질 수 있다는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이 때문에 ‘판옵티콘’(Panopticon)이나 담론에 대한 푸코의 이론을 가져오지 않더라도 이 글을 읽는 모든 우리는 시선의 권력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혹 독자들은 지금쯤 사회학, 문화이론, 미디어에 관한 연구를 떠올리고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필자는 그런 이야기를 체계적으로 할 능력도 의도도 없다. 이 이야기들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묻고 싶은 것은 간단하다. 교회도 열심히 다니고 사회에서 그리스도인다움을 나타내기 위해 노력하는 우리 기독청년들은 시선의 무게를 이겨나갈 힘을 교회를 통해서 얻고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우리는 생각해봐야 할 것들이 있다.
우리는 얼마나 상대방을 나의 시선으로 옭아매고 있을까? 우리가 어떻게 시선으로 우리를 옭아매고 있냐고 되물을지 모르겠지만 우리 안에 있는 관음의 욕구는 우리의 일상 속에서 손쉽게 만나볼 수 있다. 인기 있는 TV프로그램 중 다수는 그들의 사생활을 관음하는 것을 주 컨텐츠로 하고 있다. 심지어는 사생활의 염탐을 모여 보며 반응하는 것을 관찰하는 프로그램들도 있다. 우리의 관음의 대상은 연예인처럼 멀리만 있는 것도 아니다. 카카오톡의 친구 목록을 무심결 내리며 프로필 사진들을 훑어 본적이 있는가? 있다면 얼마나 자주 해왔을까? 더 이상 시선의 권력은 연예인, 사회 지도층처럼 한 방향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현대 사회에서 시선의 사슬이 더욱 견고해질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서로를 끊임없이 들여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본 질문에 답하기 전에 한 가지만 더 확인 해보자. 교회 안에서 우리의 시선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눈을 들어 주를 볼 때~”라는 찬양 가사가 생각나는가? 솔직해져보자. 우리는 얼마나 많이 교회 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는가? 교회 내 다양한 모임을 통해 교회는 촘촘한 시선의 그물망을 유지 발전시켜가고 있다. 교회에서의 시선은 가장 은은하게 그리고 가장 거침없이 우리의 행동을 검열하고 규제한다. 교회 안에서의 시선은 따뜻한 사랑의 눈길로 포장되지만 교회 안팎의 많은 젠더이슈들, 대형교회와 중소형교회 사이의 갈등, 성도 간 혹은 성도와 교역자간의 간극과 같이 다양한 문제들이 이 폭력적 시선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어야할 것이다. 또한 우리 주변엔 이런 그물망을 탈출하기 위해 교회를 떠난 '가나안' 청년들이 있다는 것도 조금만 관심을 가진다면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시선은 폭력의 시작이기도 하지만 사랑의 시작이기도 하다. 교회 안의 촘촘한 시선의 그물망은 어찌 보면 서로에 대한 따뜻한 바라봄일 수 있다. 같은 시선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관계와 태도에 따라서 사랑도 폭력도 될 수 있다. 다시 원래 질문을 되짚어 보자. 기독청년들은 교회를 통해 시선의 무게를 이겨나갈 힘을 얻고 있을까? 안타깝게도 우리의 교회는 기독청년들은 사회의 시선을 이겨나갈 힘이 되어주기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교회의 시선은 청년들과 모든 성도들에게 폭력이 아닌 사랑과 회복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우리의 시선을 통해 사랑을 만들어 내는 방법을 훈련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런 시선의 훈련은 우리로 하여금 사회 속에서 우리를 시선의 그물망의 연장이 아닌 사랑의 시작이 되게 해줄 수 있지 않을까? 이제 어려운 문제는 독자분들에게 넘기며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우리는 어떤 시선으로 사랑의 공동체를 세워 나가야할까? 그리고 이 사랑의 공동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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