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전 지구적 생태의 위기와 대기 오염, 자원고갈, 종의 멸종으로 환경의 문제가 초미의 관심이다. 미술가들도 이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것같다. 로버트 스미드슨(Robert Smithson)은 호수의 일부에 나선형의 방파제를 만드는 작품을 했고, 마이클 하이저(Michael Heizer)는 네바다 사막 한 가운데 24만 톤의 흙을 이용하여 거대한 언덕을 쌓는 작업을, 그런가 하면 월터 드 마리아(Walter de Maria)는 뉴멕시코 대지에 스테인리스 스틸막대 400개를 세워 <번개 치는 들판>을 선보였다. 이들의 작품은 대지를 캔버스처럼 표현의 매체로 활용하는 등 기존 미술과 차별화된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작업이 친환경적이라든가 생태위기에 대처하였는지는 불분명하다. 대지와 환경을 이용했지만 그들의 목적은 오히려 ‘열린 공간에서의 조각’이란 측면이 더 강했다. 크리스토(Christo)와 그의 부인 클로드(Jeanne Claude) 역시 미국서부 연안을 천으로 연결시키거나 호주의 해안절벽을 흰 천으로 감싸는 작업을 선보였으나 지구가 처한 환경의 문제와는 거리가 멀었다.
에코 아트의 윤곽은 요셉 보이스(Joseph Beuys)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요셉 보이스는 카셀이 전쟁으로 인한 폭격으로 재건된 도시라는 점에 착안하여 1982년 카셀 도큐텐타(Kassel documenta)에서 야심차게 일명 ‘생태사회적 조각’(ecological social sculpture)으로 불리는 참나무 7천 그루를 심는 작업을 시도했다. 첫 번째 나무와 마지막 나무를 그가 심기로 하였고 나머지는 사전에 나무를 분양받은 참여자들이 심기로 하였는데 약속대로 첫 번째 나무는 그가 심었으나 그의 돌연한 사망으로 그의 아들 벤젤이 7천 번째 나무를 심는 것으로 이 프로젝트는 마무리되었다. (그림1) 독일 녹색당을 창당했던 요셉 보이스는 푸른 숲으로 바뀐 카셀을 상상하면서 이 프로젝트를 계획했을 것이다. 그러나 보이스의 나무심기가 참나무를 성목(聖木)으로 간주하는 등 참나무를 신성시한 고대 켈트족의 애니미즘과 연관이 있다는 주장도 있어 무턱대고 좋아 할 일도 아닌 성싶다.
그림1) Joseph Beuys, 7000그루의 참나무, 1982-1987
요셉 보이스처럼 실천적인 것은 아니지만 자연체험을 강조하는 유형의 작가들로는 리처드 롱(Richard Long)과 해미쉬 플톤(Hamish Fulton)을 들 수 있다. 두 사람은 공통적으로 걷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점인데 숲과 산, 벌판, 호수 주위 등을 걸으면서 땅위에 어떤 표식을 남기고 수집해온 돌이나 나무들을 전시장에 재배열하거나(리차드 롱) 혼자 걷거나 일반시민들과 함께 걷는 퍼포먼스를 하는 가운데 주위의 자연을 음미하며 이를 사진으로 남기기도 한다. (해미쉬 플톤)
본격적인 에코아트의 작가로는 아그네스 데니스(Agnes Denes)를 들 수 있다. 아그네스는 퍼블릭 아트펀드의 지원을 받아 맨해튼 월스트리트에서 두 블록 떨어진 배터리 파크 랜드필에서 1982년에 2 에이커의 밀밭을 경작하는 프로젝트를 시행하였다. 그녀는 45억 달러에 달하는 비싼 땅에 ‘비효율적인’ 농사를 지었으며 수확한 밀을 때마침 세계 28개국을 순회한 ‘세계기아종식을 위한 국제예술쇼’를 통해 각국에 나누어주었다.(그림 2) 그녀는 지금도 퀸즈의 파 로커웨아(Far Rockaway)에 있는 120에이커의 매립지에 10만 그루의 나무를 심어 공원으로 바꾸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중이다.
그림 2) Denes Agnes, 밀밭-대면, 1982
이외에 베이시아 얼랜드(Basia Irland)는 강을 따라 지역의 물의 샘플들을 모으는 퍼포먼스를 통해 물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앤디 골드워시(Andy Goldworthy)는 나뭇가지, 잎사귀, 얼음, 바람, 밀물, 진흙 등 오래 지속하지 못하는 것들에 관심을 표현하거나, 또는 경성의 재료 대신에 현장에서 획득한 자연물을 재료로 주변 환경과 어울리는 조형을 꾸민다.
성경(창 2:28)에 따르면, 인간은 다른 피조물을 정복하고 다스리도록 선택을 받았다. 우리에게는 흔히 ‘문화명령’으로 불리는 ‘다스리는 사명’이 위임되었다. 시편 72편에 등장하는 ‘통치자’는 억압을 당하는 자에게 공의를 베풀고 곤경에 처한 자를 구해주며 가난한 사람을 돕고 의를 실천하는 왕으로 기술된다. 여기서 올바른 다스림의 실천은 곧 샬롬, 곧 모든 피조물의 번성을 이룬다. 따라서 ‘통치적인 존재’(dominion being)의 개념을 풀이한다면 군림하고 약탈하는 것보다 섬기고 보존하는 것이 원래의 뜻에 가깝다.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경험한 피조물들이 하나님께 드릴 감사의 응답이 바로 지구와 그 거주자들을 돌보는 일이다.
환경 미술가 중에는 트랙터와 덤프트럭을 동원하여 흙더미 언덕을 만드는 작가도 있고, 나무를 심어 전쟁의 참화를 겪은 지역 및 매립지를 복구하거나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의를 실천하는 미술가도 있다. 그러나 일부 아티스트들의 경우 예술적 실천속에 고대 제의와 마법을 차용하는 작가들도 있어 무조건 환경미술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신중한 분별력이 요구된다. 이런 가운데 아그네스 데니스의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나는 비록 미약한 사람이지만 가능한 한......인류를 돕기 위해 싸울 것입니다. 모든 예술은 어떤 형태로든 인류를 돕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우리의 고향별은 지금보다 살기 좋은 곳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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