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지난 10년 동안 한국에 있는 난민 등 취약한 이주민과 일을 하면서 “우리도 어디서든 이방인이다”라는 말을 자주했습니다. 이것은 물론 베드로전서에서 영감을 받은 것입니다. 이주의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이방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의 <수난>이라는 책을 보면 ‘리코브리시’(Likovrisi)라는 마을에 박해를 피해 난민들이 찾아오지만 마을의 종교지도자들은 그들을 배척합니다. 누구를 억압하고 미워할 때는 그냥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언제나 상대를 악마화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리코브리시의 종교지도자들도 마을을 찾아온 난민들을 자신의 경제와 안전을 위협하는 공산주의자요 역병을 옮기는 사람들로 악마화합니다. 1950년대 그리스를 배경으로 쓴 책이지만 우리의 모습과 너무 닮아 있습니다. “우리도 어디서든 이방인이다”라는 말은 우리를 찾아온 이방인을 악마화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 1년 동안 미국 동부에 있는 팜스쿨에서 농사를 배우면서 안식년을 가졌습니다. 팜스쿨에서 한 시간 반 정도 떨어진 미국 교회에 다녔는데 어느 날 예배 후 점심을 같이 먹던 교인이 저에게 처음 말을 걸면서 “너 불법이냐?”(Are you illegal?)고 묻더군요. 동양인 남자가 가족 없이 농장에서 일하면서 혼자 교회를 다니니 체류 자격 없이 일하는 외국인이라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물론 내가 오늘 교회 오면서 교통신호를 몇 개를 위반하기는 했는데……그러는 너는 합법이야 불법이야?” 제가 이렇게 되묻자 그는 당황해하는 모습이 역력했습니다. 크고 작은 불법을 저지르고 살았겠지만 아무도 미국 시민권이 있는 자신에게 ‘불법 사람’이냐고 물은 사람은 없었기 때문일 겁니다. 저는 그에게 저에 관해 말해주고 싶은 것이 많이 있었지만, 그는 제가 외국인인지, 외국인이라면 체류자격이 있는지 가장 궁금했나 봅니다. “우리도 어디서든 이방인이다”는 말은 우리를 찾아온 이주민을 체류자격이나 비자 타입으로 환원하지 않고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불법체류자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고, “너는 여기에 있을 사람이 아닌거 같은데”라는 뜻으로 “어디서 왔니?”라고 묻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팜스쿨에서 외국인은 저 혼자였는데 같이 생활하는 사람들 모두 친절했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 친절 때문에 저는 이방인의 취약성을 더 절실히 느끼게 되었습니다. 저의 안전이 다른 사람의 자발적인 친절에 철저하게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언어의 유창함과 민족적 동질 그룹이 없다는 것이 사람을 얼마나 취약하게 만드는지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멀지 않은 과거에 난민이자 이방인으로 살았던 경험이 있습니다. 일제의 강점과 한국 전쟁과 독재정권 밑에서 말입니다. “우리도 어디서든 이방인이다”라는 말은 역지사지하면서 우리를 찾아온 이방인의 취약성에 공감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초등학교 동창을 20년 만에 만났습니다. 이야기를 하는 중에 동창은 제가 지금 공익변호사로 살수 있었던 것은 그의 부모와 달리 저의 부모가 경제적인 여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 친구와 헤어지고 집에 오면서 처음에는 좀 서운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내가 성취한 것을 누구의 덕이라고 하니 억울했던 겁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내가 누리고 있는 대부분은 다른 이로부터 온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기 전에 “사람이 먼저다”라는 구호가 지금은 “국민이 먼저다”로 바뀌었습니다. 이렇게 바뀐 구호는 이주민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도 어디서든 이방인이다”라는 말은 우리가 한국 국적자로 누리는 것들이 선물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선물로 받은 것을 가지고 이주민에게 갑질을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그냥 한반도 남쪽지역에서 태어난 것 말고 한국 국적자가 되기 위해 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최근에 제가 즐겨 읽는 작가 중에 ‘줌파 라히리’(Jhumpa Lahiri)라는 소설가가 있습니다. 그 작가의 책이 흥미로운 것은 인도계 미국인으로 미국 사회와 인도 사회 모두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경계인으로 살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안목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신이 사는 사회를 제대로 비판적으로 보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누구도 초월적으로 그 사회를 조감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조금이나마 그렇게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우리 곁에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이방인을 두는 것입니다. 이렇게 대조 사회가 우리 가까이 있어야 우리는 비로소 우리 사회를 조금이나마 제대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도 어디서든 이방인이다”라는 말은 마지막으로 우리를 찾아 온 이방인을 나의 선생으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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