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스물일곱이라는 늦은 나이에 입대했다. 허투루 보내는 시간을 너무 싫어하는 예민한 성격 탓일까,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어떻게든 시간을 쪼개가며 전공 관련 공부를 하고 책을 읽으며 군 생활을 채워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던 어느 날, <쪽방, 사람이 산다>(2015)라는 르포 다큐멘터리를 우연한 기회에 접하면서 이 낯선 공간에 대한 생소한 열망이 촉발되고 말았다. 현대화된 서울의 한복판에서 인간이 도저히 살 수 없을 것만 같은 1평짜리 쪽방이 가득한 동네가 곳곳에 존재한다, 그리고 그곳에서도 사람이 인간다움을 유지하며 살아내고 있다는 내용이 나로 하여금 일종의 외경심을 갖게 한 것이다. 이후 공부의 방향이 빈민들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해방신학과 빈민들의 조악한 거주공간들로 뻗어 나가면서, 가난한 사람들이 끈질기게 삶을 이어가는 그 공간에 너무 가보고 싶었다. 그리고 이곳 쪽방촌을 다루는 연구를 꼭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충만해져서 후임들과 시도 때도 없이 관련된 이야기를 공유하고 그들로부터 쓴소리도 들어가며 간절함은 커져만 갔다.
스물아홉에 전역을 하고 복학을 하면서 서울역에 자리한 가장 큰 쪽방촌인 동자동 쪽방촌을 나의 공간으로 품어보기로 했다. 솔직히 그냥 들어가기에는 아무런 자신이 없었다. 사실 몇 번 가보기는 했지만, 그때마다 내가 순진하게 기대해 왔던 바와는 달리 경계심 높은 주민들에게 말 한마디조차 걸어보지도 못하고 동네 주위만 겨우 서성이다가 돌아오곤 했기 때문이다. 홀로 부딪쳐보겠다는 낭만적인 그림은 그렇게 완전히 산산조각이 났다. 상상과 현실은 그리도 이질적인 것이다. 그래서 굳은 마음을 먹고 이곳 쪽방촌에서 신앙생활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복학 후 여러 교회를 돌아다니면서 위로도 받고 은혜도 얻었지만, 가난에 동참하는 교회를 만나길 원했기에 쪽방촌에서 주민들과 함께하며 진실하게 사역해 온 교회를 너무나도 찾고 싶었다. ‘노마드’(nomad)로서 수개월에 걸친 검색과 탐방 끝에 작지만 단단한 우리 교회, ‘소망을 찾는 이’(Hopeseekers)를 찾았고, 쪽방 사역을 함께하는 평신도 사역자가 되었다. 그곳에서 나는 부족하나마 내가 할 수 있는 피아노 반주, 그리고 쪽방촌 주민들을 발로 찾아가는 심방을 통해 일주일에 두 번씩, 주민들에게 작은 위로나마 전달하며 조금씩 소망을 찾아가고 있다. 청년 예수의 발자취를 따라 한 발짝씩.
그렇게 어느덧 한 달이 흘렀고, 난 여전히 자신이 없다. 동네에 들어서자마자 코를 찌르는 악취, 쪽방촌 내에서 공원예배를 드릴 때마다 눈앞에 보이는 온갖 구토들과 비둘기 떼의 습격, 주민들 사이에서 빈번하게 드러나는 폭력과 고성방가, 알코올 중독이나 갑자기 추워진 날씨, 외로움의 영향으로 일상화되는 죽음들은 좀처럼 쉬이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고, 이곳을 스냅숏처럼 스쳐가는 사람들에게 이곳은 그런 지저분한 풍경으로만 기억되어 끝내 치워버려야만 하는 공간일 것이다. 그러나 난 단호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쪽방촌 안에 분명히 사람들의 살아 숨 쉬는 끈질긴 생명력이 있다는 믿음, 겉보기와 달리 사람들이 고통을 공유하며 서로 돕고 살아가고 있다는 그런 믿음.
참고로 우리 목사님은 18년째 이곳 쪽방촌과 서울역을 지키고 계신다. 친히 당신을 낮추셔서 성도들에게 편안하게 대해주시지만, 그분이 감내해 온 세월을 막연하게나마 떠올려보면 그 앞에서 난 감히 어떠한 말도 쉽게 던지지 못하겠다. 그저 침묵하면서 배울 따름이다. 그 오랜 시간을 쪽방촌 주민들, 서울역 노숙인들과 함께하면서도 대형교회에 굽신거리지 않았고, 후원을 위해 억지로 눈물을 자아내지 않았으며, 당당하고도 부끄러움 없이 해 오셨다는 그분의 사뭇 담담한 소신은, 두려움과 눈물이 많고 연약한 나에게도 큰 도전이 된다. 순수하게, 타협하지 않고, 이 길을 걸어내고 싶다는 오기 또한 생겨난다. 정말 더디더라도 밑바닥에 놓여 있는 가난한 사람들의 해방된 모습들을 보고 싶다. 예수가 바라던 것이 바로 그것이 아니었을까.
주민들과의 유대감, 곧 ‘라포’(rapport)를 형성하기 위해 나 또한 아직은 시간이 많이 필요할 것 같다. 그래도 확실한 것은 경험의 초창기임에도, 아니 초창기이기에 격렬한 희로애락을 겪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낯선 청년인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주민, 나를 동생, 아들, 손자처럼 느끼는 분이 아주 적지만 한두 명씩 생겨나면서 덕분에 많이 웃기도 하고 때로는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어이없는 가난과 불평등의 상황에 분노가 솟구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 자리를 지키고 예배하면서 신뢰를 쌓아가는 일이 내게 요구되고 있다. 부디 초기의 설렘을 지나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이 열릴 때가 언제일지 기약이 없더라도 배우기를 포기하지 않으며 끝까지 지치지 않기를 소망한다. 그렇게 많은 사람에게 반드시 나의 연구로 선포할 것이다. 이곳 쪽방촌의 가쁘고도 넉넉한 숨결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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