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하나의 풍경으로서 한국의 다문화 현상은 우리 모두가 ‘보는’ 풍경인 동시에 ‘잠겨 있는’ 풍경이며, 그리스도인들 역시 예외가 아니다. 방금 막 ‘하나의 풍경으로서 다문화’라고 적은 참이지만 실상 우리 모두는 다문화에 관한 한 ‘두 개의 풍경’에 잠겨 살아간다. 첫 번째 풍경은 다음과 같은 장면들로 이루어진다. 2002년 월드컵이 개최된 해, 초등학생이던 나는 상암동에 살고 있었다. 동네에서 그렇게 많은 외국인들을 마주친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하루는 학원을 가는 길에 발을 잘못 디뎌 넘어졌는데 마침 지나가던 외국인이 내게 다가왔다. “아 유 오케이?” 그냥 ‘오케이 땡큐’하면 될 것을 왜 그렇게 머리가 하얘지고 심장이 쿵쾅대던지. 겁을 집어 먹고는 그냥 “예...”하고 도망치듯 일어나 내달렸다. 그러고는 한동안 그 사건을 곱씹으면서 한 번 더 외국인과 마주하면 제대로 된 영어를 한 토막 뱉어보리라 다짐했다.
다른 한 편에는 이런 풍경도 있다. 오년쯤 시간이 흘러 중학생이 된 나는 모현면에 살고 있었다. 당시 모현은 이제 막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한 시골이자 늘 외국인들을 볼 수 있는 동네였다. 학교 친구들 사이에서는 외국인들을 지칭하는 ‘빠끼’라는 말이 있었다. 우리는 빠끼들에게 두려움을 느껴본 일이 없었다. 생각해보면 아주 만만하게 여겼고 깔보기까지 했던 것이 분명하다. 적게 잡아도 우리보다 열 살은 족히 넘는 그들에게 “헤이, 빠끼!”라고 괴성을 지르며 손을 흔들어 대거나, ‘빠끼’를 가지고 저질스러운 농담을 만들어내곤 했으니. 그런데 잠깐. 나는 아직 이 두 풍경 속 외국인들의 국적이나 외모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당신은 첫째 외국인과 둘째 외국인의 외모나 국적을 어떻게 상상했는가? 혹 전자는 백인, 후자는 동남아인이 아니었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런 상상이 ‘자연스러운’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 내면에는 다문화를 가로지르는 암묵적인 경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문화나 외국인들에 대해 한편은 경계 이편에, 다른 한편은 경계 저편에 위치시킨다. 한국인들의 머릿속에서 이 둘은 결코 같은 ‘다문화’가 아니며, 같은 ‘외국사람’도 아니다. ‘다(多)’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대한민국의 다문화는 양가적으로 구획된다. 대다수의 한국인들에게 ‘다문화’는 실상 ‘다국가의 이중문화’로 내면화 되고 있는 것이다. “백인 다문화 가정은 예능에 나오고, 동남아 다문화 가정은 다큐에 나온다”는 말은 이러한 현실을 잘 꼬집어 보여주는 것이리라.
이와 관련된 조금 불편한 진실이 있다. 우리는 ‘외국’에서 온 사람이라 하여 그 모두에게 동일한 ‘사람값’을 매기지 않는다는 것. 국적과 피부색에 따라 그 사람값을 다르게 부여한다는 것이다. 즉, 같은 ‘인간’일지는 몰라도, 같은 ‘사람’은 아닌 것이다. 인류학자 김현경은 <사람, 장소, 환대>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간이라는 것은 자연적 사실의 문제이지, 사회적 인정의 문제가 아니다.(중략) 반면에 어떤 개체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사회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어야 하며, 그에게 자리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저자의 말을 적용해 보자면 한국 사회는 어쩌면 아직 진정한 의미에서 ‘외국사람’을 만나보지 못한 게 아닐까? 엄밀하게 말해 이들은 언제나 사람 이상의 존재이거나 사람 이하의 존재로만 현상(現象)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한 노예에게 이름을 불러주고 자리를 마련해 주었던 사실을 기억하는가. 나는 다문화 현상과 기독교 신앙의 접점을 여기서 찾고자 한다. 바울은 노예인 오네시모를 ‘아들’(몬 1:10), ‘사랑받는 형제’(몬 1:16)라고 불러 주었다. 당시 노예는 법적으로나 의례적으로 비인격이었기에 권리와 의무의 주체가 될 수 없었다. 지켜야 할 체면이나 명예조차 없는 이들은 사회적으로 보이지 않는 존재인 셈이었다. 이런 시대에 살던 ‘사람’이 노예를 향해 아들과 형제라고 불렀다는 것은 상식을 넘는 파격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바울이 오네시모의 주인 빌레몬 역시 ‘형제’라고 부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주인 빌레몬과 노예 오네시모가 동등한 호칭을 갖는 것이다.
한국의 다문화 현상이 자아내는 이중적 풍경 앞(안)에서 빌레몬서를 다시 읽는다. 그리고 한국 사회에 도처에 있는 오네시모와 빌레몬을 생각해 본다. 우리 사회에 살고 있는 오네시모들을 찾아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고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이 우리네 책임이 아닐까? 바울에게 오네시모의 사람값은 얼마였던가.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아들의 생명’이라는 처절하고도 영광스러운 사람값을 갖는다. 이것이 노예조차 가족으로 끌어안을 수 있는 힘이다. 그 힘은 나를 자녀라고 부르는 신의 사랑을 경험한 데서 온다. 이 사랑의 수혜자들이 모인 교회는 사회 내의 온갖 오네시모와 빌레몬들이 가족으로서 만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공간이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한다. 물론 다문화적 현실에서 오네시모의 이름을 불러주고 자리를 찾아주는 일은 상상 이상으로 어렵고 섬세하며, 많은 고민과 희생을 필요로 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 분에 넘치는 사람대접, 자식대접 받아본 가닥들이 있는 사람들 아닌가.
※ ‘사람값’이라는 용어는 신유정의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박사학위 논문 <1단지 사람들의 사람값>(2019)에서 차용했음을 밝힌다.
이용약관 | 개인정보 취급방침 | 공익위반제보(국민권익위)| 저작권 정보 | 이메일 주소 무단수집 거부 | 관리자 로그인
© 2009-2024 (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고유번호 201-82-31233]
서울시 강남구 광평로56길 8-13, 수서타워 910호 (수서동)
(06367)
Tel. 02-754-8004
Fax. 0303-0272-4967
Email. info@worldview.or.kr
기독교학문연구회
Tel. 02-3272-4967
Email. gihakyun@daum.net (학회),
faithscholar@naver.com (신앙과 학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