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대학원 시절 지도교수님을 통해 처음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하고, 캠퍼스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한지 벌써 3년 차이다. 십여 년 내지 수십 년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온 분들도 많으실 텐데 ‘벌써’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은, 지난 1년간 정체된 듯 했던 신앙생활에 대한 회의와 안타까움을 담아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뜨거웠던 때가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 말이다. 그리스도인 대학원생으로 사는 동안, 매일 성경을 읽고, 자기를 비우는 기도를 드리며, 주님으로 인해 변화되어 가는 자신의 삶을 감사해 하며 나누는 교제의 시간이 참 많았다. 그러나 대학원 생활을 마치고 직장인으로 살아가면서부터는 그 이전의 삶과 신앙의 패턴을 유지하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많은 업무량과 상사들의 높은 기준은 사회 초년생인 나에게 잦은 야근을 필요로 했고, 신앙생활관리를 위한 절대적인 시간마저 부족하게 되었다.
이 상황을 해결하고자 상사에게 어려움을 호소하였더니, 이러한 답이 돌아왔다. “우리 연구원에서 개개인의 업무능력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요구되고 있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는 현재 우리 연구원의 구조적 문제이고 다른 사람들 역시 비슷한 상황입니다. 당장은 이러한 과정이 힘들겠지만, 분명 좋은 훈련이 될 것이고, 장차 성장하는 밑거름이 될 거예요.” 그러나 성장하는 밑거름이 된다는 말에 기대서만 하루하루를 채찍질하며 걸어 나가기에는 내 어깨의 짐이 너무 무겁게 느껴졌다.
물론 성경말씀 속에서 답을 찾으려는 노력도 해보았다. 결과는 말씀에 나타난 주님의 성품에 집중하고, 주님을 닮아 가려고 힘쓰기보다, 말씀을 따라 사는 것 같아 보이는 형식적 삶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율법주의를 범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주어진 기한에 완성하지 못할 것 같은 과중한 업무량 앞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라”(골 3:23)는 말씀을 떠올리며 어떻게 적용할 지를 고민한 적이 있었다. 그 때 개인적 혼란은 법적으로 할당 받은 계약상의 근무시간 안에만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인지, 아니면 직장의 필요를 최대한 만족시키기 위하여 자발적 야근도 마다하지 말아야 하는 것인지를 분별하는 문제였다. 말씀이 전하는 의미의 핵심은 우리의 정체성이 주님이 인도하신 모든 삶의 자리에서 항상 겸손한 자세로 이웃을 섬기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사실을 간과하고. 그저 말씀의 형식만 적용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또한 나는 직장에서 한동안 스스로의 관점으로 상황을 분석하고 사람을 판단하는 일을 그치지 않았다. 직장 내 조직의 규모와 연구원들의 역량을 고려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 더 많은 것, 더 좋은 것을 추구하는 리더가 탐욕스럽게 느껴졌고, 실무자의 고충을 잘 알면서도 상급자의 무리한 지시에 침묵하는 중간 관리자들 역시 탐욕스럽다고 정죄하였다. 나아가 자기 유익을 위해서는 타인을 밟는 것이 다반사인 것 같은 세상 속에서 철저한 ‘을’의 입장을 강요받는다고 생각하니, 낙심되고 두려웠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나는 그 때에 이르러서야 스스로 움켜쥔 주먹을 펴고 주님 앞에 다시 엎드렸다. 그리고 어느 날, 출석하는 교회 멘토의 제안으로 한 말씀을 묵상하게 되었다. “우리는 여러분 모두를 두고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 또 우리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여러분의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둔 소망을 굳게 지키는 인내를 언제나 기억하고 있습니다.”(살전 1:2-3).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그랬듯이, 나는 이 말씀을 믿음이 흔들리고 있는 ‘나’에게 공동체가 믿음 안에 굳게 서라는 권면과 격려를 해주는 것으로 받았다. 아울러 바울 사도가 복음을 전할 때 세상의 냉대와 핍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 안에서 담대하고 기쁘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 장면도 주목하게 되었다. 바울의 상황은 분명 억울하고 낙심 될 만한 상황인데 어찌하여 여전히 담대할 수 있었을까? 그는 결코 불순한 마음이나 자기 속임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고, 그저 스스로를 하나님께 선택받고 인도 받은 자로 굳게 믿었으며, 복음 전도는 사람들이 아닌, 오직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에 있다는 비전을 확실히 붙들고 있는 자였다. 다시 말해서 그가 고통이 수반하는 가운데에서 조차 맡은 일을 잘 감당해 낼 수 있었던 것은 그 모든 것을 주님께서 맡기신 일로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나의 시선은 주인 되신 하나님의 역사와 그 선하신 인도하심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 세상의 악을 직시하는데 머물러 있었다. 직장 내에서 누군가의 권력욕과 성공욕을 채우는 도구로 이용당하고 있는 존재로 스스로를 생각하며 가엽게 여겼다. 주님은 그러던 나에게 다시 한 번 “내가 너의 참 주인이고, 필요한 곳에 내가 보냈다. 그 곳이 많이 힘들더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힘을 내어라.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라는 믿음을 주셨다. 나는 이 믿음의 기초 위에서 비로소 다시 한 번 자유를 누리며, “……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8:17)는 말씀에 힘입어 주님의 십자가 고난에 기꺼이 동참하겠다는 선포를 감히 하고자 한다. 자기중심적 세상의 관점으로는 오직 주님 뜻대로, 더 낮은 곳으로 기꺼이 향하고자 하는 이 마음과 삶이 여전히 어리석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결코 ‘단순한 무지에서 기인한 어리석음’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위한 어리석음’이기에, 세상의 어떤 ‘동정 어린’ 시선으로부터도 자유할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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