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를 분석하면 우리의 생각을 알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한국어는 앞에 나오는 말이 뒤에 나오는 말을 꾸민다. 그렇다면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용어의 주안점은 '기독교'라기보다 '세계관'에 있을 것이다. 우리의 싸움은 '세계관' 사이의 싸움이다. 다양한 '세계관' 내에서 기독교적인 것을 구별해내자. 그 안경을 끼고 보면 기독교 세계관이야말로 가장 뛰어난 '세계관'이라는 점이 명백하다. 기독교 세계관 운동을 미약하나마 들여다본 후의 개인적 감상이다.
여기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숨겨져 있는 듯하다. 기독교 세계관 자체에만 과도하게 집중할 경우, 여타의 세계관에서 '기독교' 세계관으로의 이행하는 동역학을 설명해내기 어렵다. 마치 참호전 같은 포스트-진리 시대의 사상 전투에서, 땅을 더욱 깊게 파는 일은 패배를 지연시킬 수는 있어도 그 자체로 승리의 발판이 될 수는 없다. 다양한 세계관들을 체계적으로 분절하고 정리하여도 마찬가지이다.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메커니즘은, 다른 모든 '세계관' 운동에서도 그대로 차용할 수 있는 구조를 지니기 때문이다. 결국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방법론적 차원에서 변화되어야만 한다.
필자는 기독교 세계관적 신앙이 기독교 세계관 운동에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본래 복음주의적 기독교 신앙에 기초하여 이를 증진하고 확장시키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확실하게 믿고 지적으로 이에 동의하면 세계를 바라보는 나의 시각이 바뀌고, 더 나아가 나의 행동과 습관, 결과적으로 존재 전체가 변화하게 된다. 필자는 이러한 기독교 세계관적 신앙만이 세계관의 전회를 가져오며, 그러므로 이 위에서만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성공할 수 있다고 본다.
기독교 세계관적 신앙의 전형은 아브라함이 옳다 여김을 받은 믿음에서 찾을 수 있다(창 15). 그는 여호와를 믿었으되,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으리라”는 말씀을 정말로 믿었다. 이것이 어떻게 세계관적 변화인가? “그가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자를 있는 자로 부르시는 이셨다”(롬 4:17). 말라비틀어진 100세 노인의 몸을 살려 잉태하게 하시는 부활의 하나님 앞에서, 아브라함의 생물학적-과학적 세계관이 바뀌었다. 단 한 명의 족장으로부터 큰 나라의 백성들을 부르시는 창조의 하나님 앞에서, 아브라함의 사회학적-역사적 세계관이 바뀌었다. 그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 그것에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롬 4:18, 22).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하나님의 약속을 그대로 동의하고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의 세계관을 수정한 것이다.
이러한 기독교 세계관적 신앙의 정수는 다음 두 이야기에서 다시 드러난다. 먼저는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에 도달하였음에도 정착하지 않고 여전히 유목민처럼 장막에 거한 일이다(창 12).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 새 예루살렘을 미래적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히 11:8). ‘장차 올 세상’ 혹은 ‘내세’로 표현되는 하나님의 나라를 종말론적 세계관으로 바라본 것이다(히 2:5, 6:5). 다음은 약속의 자손 이삭을 죽여 바치라는 말씀에 순종한 일이다.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에 직면하여 고뇌하였겠지만, 그 자신이 부활의 하나님을 경험하였기에 하나님이 이삭을 능히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하였다(히 11:19). 이는 아브라함의 행위가 매우 치열한 논리적 고찰의 결과였음을 의미한다. 뼛속 깊이 새겨진 기독교 세계관적 신앙이 여타의 과학적 세계관을 압도하며 부활 신앙의 정수를 보여준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과연 올바른 기독교 세계관적 신앙을 전제하고 있는가. 필자가 공부 중인 대학 주변에서 모임, 행사, 학회 등으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을 접하지만 긍정적으로만 답하기는 어렵다. 세상을 이기는 믿음이 아닌,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는 사람들이 많게 느껴진 까닭이다. “믿는다”는 말보다 "학문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교회에서 들어 왔던 것과 다르다", "생각해볼 일이다"라는 말이 많다. 지금까지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하나님을 믿는 영역을 줄이고 경험적 학문이 개입할 영역을 늘려온 것은 아닌가. 우선순위가 뒤집혀야 한다. 기본적으로 경험적 학문의 가치를 인정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믿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글의 통일성을 다소 해칠 수 있으나 동역회에 제언하고 싶다. 첫째, 상당수 구성원들을 품어내지 못한 한계를 절감하고 울타리를 넓혀야 한다. 둘째, 보다 엄밀한 학술적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특히, 학술지 <신앙과 학문>에서 적정 수준에 미달하는 논문이 게재되는 경우가 없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셋째, 진실한 미래지향성을 갖추어야 한다. 앞으로 개최되는 학회에서는 회고나 성찰보다 전망과 비전 제시가 더 풍성해지는 나눔의 기회를 소망한다. 소장 학자들이 앞에 서는 기회 또한 더 적극적으로 열려야 한다. 주제 강연의 질의문답 시간에 질문 순서가 나이순으로 정해지는 것 같은 인상은 개인적으로 아쉬움이 크다. 과연 동역회는 다음 세대를 위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되는 것은 바로 그런 면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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