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한 해를 마무리하거나 새로 시작할 때면 양화진과 절두산의 순교자 묘지를 방문하곤 한다. 며칠 전에도 홀로 그곳을 방문하고 왔다. 묘지는 남루하고 볼 품 없는 곳이지만 내게 묘지는 도시의 심장이자 영혼의 정화소이다. 자신이 흙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매일 상기하는 것은 이런 저런 허명으로 자아에 붙은 욕망의 찌꺼기를 말끔하게 정리해 주기 때문이다. 또한 묘지는 시간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시간을 넘어있는 시간 속의 유일한 장소이자 공간이다. 죽음을 상기하지 못 하는 이는 생의 의미를 이해하기 쉽지 않고, 생의 방향을 가늠하기 쉽지 않다. 나아가 묘지는 인간으로 하여금 태어나서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로서 날을 계수하며 살도록 인도해 주고, 동시에 부름 받은 단 하나의 삶을 집중하도록 해 준다. 또한 묘지는 삶을 더 단순하고, 재미는 다소 없지만, 참된 즐거움과 행복만 향유하도록 인도해 준다. 그리고 묘지는 더 많은 것이 아니라 단 하나라도 올바르고 더 깊고 깊이 사고하도록 이끌어 준다. 하지만 무엇보다 묘지에 서면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침묵은 단순히 말의 부재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 하나님에 직면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의 한계에서 이루어지는 침묵이기 때문이다.
이 침묵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독교 세계관을 생각해 본다. 기독교 세계관의 본질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것이다. 또한 그 본질은 우리가 자신의 관점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간주하려는 독단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세상을 보는 자기 인식의 타락과 왜곡 즉, 결점과 부족함을 겸허히 인정하는데 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는 것은 계시와 은총의 영역인 동시에, 세상 속에서 실현할 올바른 이성과 합리성을 필요로 하기도 한다. 이 지점에서 기독교 세계관의 긴장이 발생한다. 흔히 말하는 창조, 타락, 구속의 도식은 기독교 세계관을 이해하는 하나의 도식일 뿐이다. 이 도식을 절대화된 것으로 받아들일 때, 세상은 이 도식에 기계적으로 포섭되는 대상으로 전락한다. 세계관은 세계라는 실재의 문제이지 기독교를 투사한 관념적 세계의 구축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독교 세계관으로 세계에 대한 가치, 의미, 이해 및 해석을 추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기독교 안에서 그 추구의 적절성과 구체성을 확보 받을 수 있다. 이때 기독교 세계관은 우리에게 기독교와 세계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시선의 왕복’을 자기 이해의 구조로서 개방해 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기독교와 세계는 상관적 관계 속에 있다.
학문으로서 기독교가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이어진 하나님 은혜의 축적과 그 축적을 문자로 정립하는 활동이라면, 세계라는 실재는 미래로부터 현재로 도래하고 계신 하나님의 자기 활동의 살아 있는 현장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와 세계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고할 때, 그 둘 사이에는 우선적 순위가 없으며 그 둘은 상호보완적 관계를 갖는다.
기독교 세계관을 통해 실천하려는 핵심, 곧 성경의 핵심은 무엇일까? 실천을 하기 위한 가치 또는 ‘좋음’(Good)을 파악해야 한다. 기독교의 핵심가치는 ‘믿음, 소망, 사랑’이며, 실천원리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이것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은 이 가치에 동참하고, 실천원리를 통해 현실에서 이 가치를 실현해 낸다. 이 핵심가치와 실천원리로 세상을 총체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기타 세속의 세계관과는 다른 기독교 세계관의 정수이다. 그러나 한 가지 유의할 점은 이 핵심가치와 실천원리를 단순히 개념화하고 그 개념을 절대화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이성은 타락한 이성으로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개념과 함의를 계속 성찰하고 반성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개념이 우상이 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핵심가치와 실천원리가 각자의 실존과 시대의 환경에서 구체화 되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인 성부와 성자와 성령과의 살아있는 인격적 관계 속에서이다. 이 하나님과의 관계는 철학적으로 표현하면 우정의 관계이자 놀이의 관계이고, 신앙적으로 표현하면 믿음의 관계이자 사랑의 관계이다. 이는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유익을 구하는 관점이자 행위이다. 이것은 타락으로부터 회개하여 중생한 이성과 합리성뿐만 아니라 계시와 은총이 기독교 세계관과 본질적인 관계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핵심가치와 실천원리를 통해 하나님의 진(眞)과 선(善)이 구현된다면,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미(美)가 구현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진리와 선함과 아름다움이 구현되고 실천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총체적 인격과 영광을 드러내는 관점, 즉 기독교 세계관의 본질로서 하나님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것에 대한 구현과 실천적 구조화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자신에게 잠시 위탁된 각종 타이틀을 통한 말과 행위가 아니라, 자신과 하나님이 직면하는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침묵 속에서 핵심가치와 실천원리를 통해 자신을 그리스도인으로 계속 빚어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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