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이 책은 기독교 철학적 입장에서 평가한 서양철학통사 격인 2부 앞에 세계관과 철학, 기독교 신앙의 관계와 필요성을 다룬 1부, 그리고 로마 가톨릭 철학을 포함한 현재의 기독교 철학 상황 소개와 북미의 신칼뱅주의 기독교 철학인 ‘개혁주의 인식론’을 대표하는 플랜팅가(A. Plantinga)와 월터스토프(N. Wolterstorff), 또한 네덜란드 신칼뱅주의 기독교 철학이라 할 ‘개혁주의 철학’을 대표하는 도이어베르트(Dooyeweerd), 볼렌호븐(Vollenhoven), 시어벨드(Seerveld) 등을 소개하는 3부가 마치 한 지붕 세 가족이 살고 있는 큰 집과 같아서 만만하지가 않았다. 번역자 신국원의 말에 깊이 공감한다. “이 책의 특수한 접근은 이제껏 국내에서는 한 번도 접할 수 없던 유의 통찰을 담고 있다.”(483쪽)
<그리스도인을 위한 서양 철학 이야기>의 장점은 온건하지만 명료한 어조에 있다고 생각한다. 정중하고 충실하게 철학사조들을 이해하도록 이끌면서, 허세어린 단정적 평가와 결론을 피하되, 신칼뱅주의적 기독교 철학의 입장을 명료하게 서술한다. 또, 이 책은 성경 내러티브가 보여주는 창조와 타락과 구속 교리에 분명히 서서 철학함이 갖는 생명력을 잘 드러낸다. 철학과 신학을 하면서 끊임없이 성경본문과 충실히 씨름하는 하만이나 키르케고르의 모범을 소개해줄 때의 감동도 좋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증거에 의한 보증에 의존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신칼뱅주의 기독교 철학의 ‘이성없는 믿음’ 입장이 왜 이성을 무시하거나 경시하는 신앙주의와는 다른지 보여주는 대목이나 ‘보증된 믿음’ 개념의 5가지 핵심요소를 소개하는 대목도 참 좋다. 북미의 개혁주의 인식론이 영미의 경험론/합리론 전통에 선 인식론적 분석철학인 반면, 네덜란드의 개혁주의 철학은 독일의 초월적 관념론 전통에 서 있는 다른 유형의 철학이라는 분석도 명쾌하다. 무엇보다 월터스토프가 팔레스타인 인권과 동물권 보호에 헌신하는 대목은 모든 참된 지혜는 변혁적 차원을 갖는다는 크레이그 바로톨로뮤(Craig G. Bartholomew)의 강조점을 예시하는 좋은 사례로 들린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전통에 서 있다고 천명하는 이들답게 아우구스티누스의 논리전개가 사랑에서 사랑으로 끝나듯, 월터스토프가 <사랑과 정의>를 저술했다는 정보도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기독교 세계관이나 기독교 철학을 논하는 개신교인들이 사랑이라는 주제를 더 많이 이야기했으면 좋겠다.
이 책을 읽으며, 떠오른 대학 시절의 추억이 있다. ‘기독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강의 내용들을 다 믿지 말고, 따져보라던 손봉호 교수님, IMF 해 푸코(Michel Foucault) 책이 구내서점에서 대중잡지같이 팔리던 장면, 성소수자 동아리의 커밍아웃, 쉐퍼(F. Schaeffer)와 제임스 사이어(James Sire)에 대한 독서토론, 위르겐 하버마스(J. Habermas), 김수환 추기경의 특강, 토마스주의와 칸트 사이를 오가던 가톨릭 신자 교수가 더는 인격신을 인정할 수 없다고 밝히던 기억, 인문대학에서 <무신론> 교양과목을 수강했던 일 등.
“왜 이 시기 내게 이 책을 읽게 하셨을까?” ‘한 방향의 긴 순종’으로서 지성의 제자도를 걸어왔으나 이리저리 흩어져있던 나의 내적 구슬들, 어쩌면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이제 꿰어 목걸이로 엮어주시려나 싶다. 또 내게 고민어린 질문을 던지던 문학도 교회청년에게 소개하거나, 교회 공부모임 교재로 추천할만한 책을 알려주셨다는 생각도 든다.
두 가지 질문이 독서를 마치며 떠올랐다. 배제와 혐오, 무능과 무책임, 정치적 분단구조를 그대로 옮겨온 듯한 진영논리적 논의구조와 피아식별의 도구로 기독교 신앙이 소비되는 한국 기독교 상황에서 기독교 철학 논의에 연관된 이들은 과연 기독교 철학의 필수적 속성인 선교적 속성을 잘 살려 오늘의 대한민국과 한반도, 동아시아의 사람들과 역사를 만나고 있을까? 사랑과 정의가 얼싸안는 선교적 비전을 위한 기독교 세계관, 기독교 철학 논의가 되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시길 기도하며 이 글을 쓴다. 두 저자는 또 다른 공저서인 <세계관은 이야기다>에서 부정의한 사회경제구조와 정치상황 안에서 무능하고 무관심했던 자신들의 교회배경을 털어놓고 있음을 본다.
또 한 가지 질문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규칙서>를 읽으며, 아우구스티누스가 가르친 성경본문의 4중적 의미를 따라 ‘렉시오 디비나’(거룩한 독서)의 방식으로 기도하는 나에게 신칼뱅주의적 기독교 철학은 신비와 신성, 거룩이라는 주제들과 관련된 영성적 추구에 어떤 빛을 줄 수 있느냐는 것이다. 크레이그 바르톨로뮤는 <욥기>를 해설하면서 노리치의 줄리안이라는 중세 기독교 신비가를 인용하고, 칼 융(Carl Jung)을 끌어들여 성경본문을 해설하고 있는 것을 본다. 신칼뱅주의적 기독교 철학은 성령의 신학자인 칼뱅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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