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나는 ‘생물학적’으로만 보자면 ‘X세대’를 바라보고 자란 ‘밀레니얼’이다. X세대라는 말의 뜻이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나는 그들을 동경했다. 사회적 분위기를 지배한 (이 단어를 정말 싫어하지만) ‘꼰대’들에게 뭔가 반항적이었던 그들. 특별히 ‘서태지와 아이들’의 곡들은 당시 감수성이 뛰어났던 중학생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기독교학교 교사로서 일할 때도 “됐어 됐어 이제 됐어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라는 <교실 이데아>의 가사가 나의 교육철학에 큰 흔적으로 남은 것을 보면 그 영향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할 만하다. 88만원, N포, 90년생, 밀레니얼, G세대, 페미니즘 등, 최근 몇 년 동안 청년 세대를 지칭하는 많은 단어들이 등장했다. 당사자인 청년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청년들은 다양하게 해석된다. 이 용어들은 사회구조, 자본의 구조를 실증적으로 반영한 불평등의 아이콘이나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는 담론의 자료가 되기도 한다.
청년들을 어떻게 지칭하든 간에 청년은 언제나 구세대와 구분됐다. 당연한 말이지만, 각 시대는 특유의 구조와 감성을 공유한다. 특히 감수성이 뛰어난 특정 나이대의 사람들은 더욱 그렇다. 그들은 그들만의 언어를 공유하고, 그들이 보편적으로 겪고 있는 사회적 구조에 대해 앞선 세대보다 민감하다. 세대론과 관련하여 회자되었던 공정 경쟁, 불공정 경쟁 역시 현재의 사회적 구조와 이에 민감한 세대의 문제의식을 잘 보여준다. 이런 세대론이 부상하면서 진부하지만 풀리지 않을 것 같은 ‘소통’의 문제 또한 여전하다. 가해자와 피해자로 보여지기까지 하니, 과연 “가해자와 피해자는 소통할 수 있는가?”를 묻게 된다.
돌아보면 나도 그랬다. 비교적 큰 교회에 다녔던 학생 시절에는 교회의 구조상 학생들이 어른들과 함께 예배하고 소통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교회 밖이라고 달랐을까? 학창 시절 인격적 소통을 나눴던 학교 교사가 있었는가에 대해 묻는다면 그리 긍정하며 대답하지 못하겠다. 그 때는 그렇게, 어른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청년이 되어 개척교회를 섬기게 되며 전혀 다른 경험을 하게 되었다. 장년들과 함께 하는 예배와 식사, 많은 대화와 만남, 무엇보다 청년들에게 매우 관심이 많은 그들이 좋았다. 교회에서 어른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쌓여갈수록, 어느새 그들의 등을 보고 따라가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교회에서 만나는 초등학생 대부분은 장년들의 자녀였고, 내가 어린이를 대하는 태도 또한 청년인 우리를 대하는 장년들과 같았다. 그랬다. 나에겐 소통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소통할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교회가 설립한 기독교학교에서 고등학생들과 함께 한 시간이 많았다. 반별 학생이 많지 않아 담임교사는 각 학생에 대해 잘 아는 편이다. 아마도 부모 다음으로 많이 알 것이라 감히 짐작한다. 물론 학생들이 교사를 아는 바도 같다. 상담을 한번 하면 2~3시간은 기본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학생들은 졸업 후에도, 심지어 군대에서 휴가를 나와도 학교에 들러 교사들을 만난다. 졸업 후에도 함께 독서모임을 하자는 학생들과 지금도 만나고 있다. 또한 나는 교회의 청년부 간사로서도 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을 비롯하여 일반 청년들과 만난다. 청년들은 나와 세대가 다르지만 이들과 소통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적은 거의 없다. 도리어 청년들은 어른을 원한다.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그들의 삶에 관여하는 그런 어른을 달라고 말이다.
기독교신앙은 ‘대대로(generation to generation) 전해지는’ 신앙이다. 전해진다는 건 응당 전하는 세대와 전해받는 세대를 전제한다. 그리고 이런 세대들이 모인 공동체가 바로 교회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본질상 앞선 세대와 다음 세대가 함께 하며 그렇게 되어야 한다. 이에 따라 신자는 언제나 이중 정체성을 갖는다. 그렇다. 우리는 앞선 세대이면서 오는 세대다. 우리는 앞선 세대로서 우선적으로 다음 세대가 처한 사회적 환경과 고민 등을 알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또한 그들에게 어깨를 빌려주고, 그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 많은 방향성이 있겠지만, 특별히 좋은 가정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 가정은 하나님의 형상인 남자와 여자가 어떤 관계를 가져야 하는지(젠더), 부모와 자녀가 어떤 소통을 해야 하는지(세대론)에 대한 가장 중요한 기초가 된다. 이를 교회가 아닌 어디서 배울 수 있단 말인가.
또한 우리는 오는 세대로서 앞선 세대를 존중하고, 그들의 생각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다음 세대의 처지를 이해하는 것만큼이나, 앞선 세대 또한 이해해야 할 역사적 의무도 있다. 더 나아가 앞선 세대에게 신앙을 배워야 한다. 물론 배울만한 신앙의 선배들이 없다는 성토가 많다. 하지만 한국교회에는 귀한 신앙의 선배들이 아직도 존재한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우리가 위치한 세대가 어떠하든지 세대 간의 경쟁과 단절은 성경적이지 못하다. 특별히 앞선 세대는 다음 세대의 정당한 요구를 들어야 한다. “어른을 달라.” 바로 이것이다. 물론 이 모든 건 전 세대가 만날 수 있는 시간과 장소가 전제이긴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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