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인간은 상대방이 하는 말을 들어줌으로써 사회 안에 서로의 자리를 마련한다. 의사소통 행위는 그 근본에서 사회적 인정 행위이다. 누군가의 말을 끊는 것이 ‘무례’(無禮)인 이유는 그것이 그 사람의 ‘사회적 자리’를 침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리더는 자신이 공동체의 말을 독점하는 것을 우려한다. 말의 배분(독점과 양보)이 권력 관계 위에서 이루어짐을, 그리고 이를 형성함을 알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경청’은 낮아짐과 섬김의 근본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을 경청하는 가장 근본-급진적 방법으로, 스스로 인간이 되셨다.
복음주의 교회에서 전형적인 대화의 도식은 이렇다. ‘목사-장년-남자’는 ‘말하고’ ‘성도-청년-여성’은 ‘듣는다.’ 교회에서,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 예배의 꽃이 된 설교에서, 말은 전적으로 설교자인 목회자에게 귀속된다. 매주 설교 ‘의례’를 통해 목회자는 말하는 발화자의 위치를, 성도는 경청하는 청자로서의 위치를 훈련한다. 즉 ‘말함으로 인도하는 목회자’와 ‘들음으로 인도함 받는 성도’라는 사목적 관계(pastoral relationship)는, 매주 설교를 통해 수행되며 재생산된다. 설교의 공간인 예배당은 반복되는 설교 의례 속에서 목회자와 성도가 각자의 위치와 서로 간의 위계를 자연스럽고 기쁘게 받아들이기에 이르는 훈육(discipline)과 주체화의 공간이기도 하다.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는 제대(祭臺) 및 제단(祭壇), 성수대(聖水臺), 고해소 등 가톨릭 신학을 반영하는 공간을 없애고, 회중이 오로지 설교자와 설교에 집중할 수 있도록 예배당을 재설계했다. 개신교 예배당 앞쪽에는 한두 개의 단으로 높여진 강단이 있고 그 위에 설교자가 말씀을 선포하는 강대상이 있다. 강대상을 마주보고 장의자들 여럿이 열과 오를 맞춰있다. 많게는 10명이 함께 앉는 장의자는 성도들이 예배 공간으로부터 이탈하는 것을 억제한다. 다닥다닥 붙여 앉는 장의자에서 홀로 자리를 이탈하기 위해서는 여러 성도들의 예배를 방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1인용 의자와 달리 장의자는 그 방향과 위치를 개인 임의대로 바꾸기 어렵다. 강단을 향해 그 위치와 방향이 고정되어있는 장의자는, 설교가 마칠 때까지 성도들이 설교자의 ‘음성’과 ‘시선’ 안에 머물도록 강제한다.
설교자가 위치한 높은 강대상과 이를 향해 고정된 장의자들로 집약되는 예배당 공간에서, 성도들은 설교자의 ‘눈 안’에 더 쉽게 들어온다. 목사님들의 익숙한 말버릇처럼, 오늘 누가 오지 않았는지, 누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졸고 있는지, 강대상에 서면 “다 눈에 들어온다.” 집단으로서의 회중이 개별 성도로서 ‘파악’되는 순간. 이런 목회적 ‘시선-파악’은 설교를 듣는 성도들에 대한 특정한 개신교적 관심과 훈육을 반영한다. ‘(눈으로) 본다’는 것은 인식이자 파악의 행위이고 이는 훈육의 기본이다. 개별 성도에 대한 ‘인식-파악’ 없이 ‘진단’은 불가능하며, ‘진단’ 없이 ‘영적 지도’와 ‘훈육’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코로나 19’ 사태는 현장 예배에서 작동해 오던 설교자와 회중 사이의 이와 같은 위계적 시선-파악-진단-훈육의 작동을 갑자기 중단시켰다. 성도들이 같은 시공간에 모여 예배드릴 수 없게 되자, 이들의 (육신 뿐 아니라) 영적상태가 목회자의 ‘눈-시선-파악’ 안에 들어오지 않기 시작했다. 온라인 예배에서 대부분의 성도들은 장의자가 아닌 자기 집 편안한 소파에 앉아 컴퓨터 혹은 TV 스크린을 마주한다. 원하면 그 화면 앞을 떠날 수도 있다. 예배를 드리는 각 성도의 자세와 태도에 대한 즉각적 관찰, 파악 및 지도는 불가능하다. 온라인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할지 미리 ‘지침’을 줄 수 있지만, 이를 정확히 지키고 있는지 즉각적으로 파악하고 지도할 길이 없다. 이에 대한 훈육은 오롯이 성도 자신의 책임 아래 남는다.
주일날 성도들의 눈과 귀와 엉덩이를 설교자에게로 강제하는 것이 불가능해지게 되면, 담임 목회자가 독점해 온 배타적 설교권은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된다. 현장 예배 중단은 온라인에서 성도들이 다른 목사의 설교를 들을 수도, 혹은 아예 설교를 듣지 않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예배가 유례없는 규모와 속도로 ‘경쟁’과 ‘선택’이 가능한 ‘시장’에 던져지게 되는 것이다. 예배당에서 매주 반복되어 오던 목사와 성도 간의 위계적 발화-경청의 의례가 불가능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의례가 재생산해 오던 목사와 성도 간의 위계적 관계 또한 균열을 입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대화의 다방향성(multi-directionality)을 전제로 디자인된 온라인 플랫폼에서의 예배 경험이 축적될수록 일부 성도들은 목회자와의 새로운 대화적 관계를 갈망 및 요청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 19’ 사태에서 교회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온라인 예배도, 성도들의 흐트러진 예배 자세도, 언론도, 국가도, 바이러스도 아니다. 바로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자기 자신의 안위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교회 자신의 나르시시즘이다. ‘코로나 19’ 사태로 인해 수많은 이가 목숨을 잃고, 실직당하고, 기근에 시달리며, 폭동과 공권력의 폭력을 경험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한국 교회를 지배하는 관심들이 오로지 교회 자신과 관련된 것 (현장예배 재개 여부와 시기 및 온라인 예배 방식 등등) 뿐이라면, 교회가 말하는 ‘십자가’, ‘자기 부인’, ‘섬김’, ‘하나님 나라’와 같은 단어들은 너무도 왜소해질 수밖에 없다. ‘코로나 19’ 사태가 드러내며 심화시키는 사회적 모순들에 한국 교회가 더욱 관심 갖기를 바란다. 그 모순들 가운데 억압받고 고통 받는 이들의 목소리를 경청함으로 이들의 자리를 사회 안에 마련해 나가고 이들의 고통에 함께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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