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일반은총 영역의 믿음과 분투
이종섭 (찬미교회 담임목사, 시인)
<페스트> / 알베르 까뮈 / 김화영 역 / 민음사 / 2020
노벨 문학상 수상자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가 1947년에 펴낸 <페스트>(La peste)를 살펴본다. 보통 때와는 다른 기준이 있다. 문학작품으로만 읽기보다 ‘코로나 19’라는 상황을 돌아보기 위해 읽는 것이다. 역사학자 카(E. H. Carr)가 말한 ‘역사를 공부하는 목적’과 같다. 과거의 역사를 거울삼아 현재의 역사를 극복하는 것이다. 기준이 더 있다. 과거의 문학작품을 통해 현 상황을 통찰하는 것을 넘어 ‘기독교인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을 가지고 <페스트>로 들어간다. 무대는 알제리 해안 도시 오랑이다. 죽은 쥐들이 나타나면서 페스트를 선포하고 도시가 봉쇄된다. 공포와 고통과 죽음이 난무한다. 전염될 수도 있고 전염시킬 수도 있는 상황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를 만드는 상황이다.
극한의 절망 속에서 투쟁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의사 리유는 의술이 페스트와 싸우는 절대적인 방법이라 생각한다. 오랑에 묵고 있던 여행자 타루는 도시의 상황을 기록하면서 보건대를 만들어 활동하다가, 페스트에 전염되어 세상을 떠난다. 파늘루 신부는 페스트가 신의 징계라고 믿으며 회개를 촉구하던 중, 리유를 만나 보건대 활동에 참여하다 죽음을 맞는다. 신문기자 랑베르는 오랑을 취재하다 페스트 때문에 오랑에 갇힌 후, 여러 번의 탈출 시도 끝에 보건대에 합류한다.
투쟁의 중심에는 혈청 개발과 방역에 힘쓰는 보건대가 있다. 시민들의 연대를 통해 인간의 가치를 구현하며 희망을 추구한다. 인간성 안에 희망이 있다고 믿으며 페스트에 둘러싸인 부조리를 타개한다. ‘인간이란 누구며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인간의 연대를 통한 희망으로 <페스트>를 통해 얻게 되는 일반적 가치다. <페스트>는 극한으로 치닫는 상황 속에서 기독교가 말하는 일반은총의 가치와 의미를 그렸기 때문이다.
전염병으로 고립된 상황에서는 도피적 자세와 초월적 자세를 가지기 쉽다. 도피적 자세는 나와 상관없다는 생각에서 나오는 행동으로 질병이나 고통을 회피한다. 초월적 자세는 그 상황을 전적으로 초월적인 신에게만 의존해서 질병과 고통을 해결하려 한다.
도피와 초월이라는 양극단은 일반 은총을 떠나 일반 이성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개념이나 믿음 모두가 없는 자세를 버리고 질병과 고통에 맞서야 한다. 이것이 기독교인이 가져야 할 자세요, 예수님이 죄 많은 세상에 성육신하신 방식이다. 세상을 떠나 도피하고 은둔하는 것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방식이 아니다. 세상에 동화되거나 세속화되는 것도 예수님이 말씀하신 방식이 아니다. 죄 많은 세상에 오셔서 구원하신 예수님처럼, 그렇게 예수님과 동일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 일반 은총의 영역에서 중요한 실행 명제가 있다. <페스트>가 말하는 성실성이다. 평범한 시민들의 노력과 투쟁으로 암울한 현실을 극복하는 성실성의 문제다. “이건 성실성의 문제예요. 비웃을지 모르지만,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입니다.”라는 말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한다.
더불어, 인간의 존엄에 대한 신뢰도 필요하다. “인간에게는 경멸해야 할 것보다 찬양할 것이 더 많다”는 리유의 말은 인간을 신뢰하는 뿌리에서 나온다. 인간에 대한 신뢰야말로 싸움을 지속할 수 있는 무기가 되면서, 동료들과 연대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 페스트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누구든, 그들을 위해 싸울 수 있는 신념이 된다. 성실과 신뢰는 고통을 극복하는 실제 무기로써, 이 두 가지는 동시에 필요하다. 성실을 추구하나 신뢰를 추구하지 않으면, 성실성의 방향이 달라지거나 본질이 흐려진다. 신뢰를 추구하나 성실하지 않으면, 그 신뢰를 유지하거나 보존하기 어렵다. 뿐만 아니라, 성실은 자신을 향한 자세요, 신뢰는 타인을 향한 자세라고 할 때, 자신과 타인이 연대해야 하는 구조에서 반드시 필요한 도구들이다. 나는 다른 사람이 필요하고 다른 사람은 나를 필요로 하는 것이 위기 상황의 요구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 위에 반드시 가져야 할 자세가 있다. 인간의 성실성과 신뢰에 따른 존엄이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 그 보존과 실행의 절대자이신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 인간 스스로는 일반 은총 영역에서 허락하신 인간의 성실성과 존엄을 유지할 수 없다. 유지할 수 있다고 해도 불안하거나, 고통과 범죄 앞에서 무너지고 만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부패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절대자이신 하나님께 의탁해야만 성실성과 존엄성의 본질을 실행할 수 있다. 한계에 부딪칠지라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성실과 존엄의 싸움을 완성할 수 있다.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라는 개념을 자신의 지혜로 삼는다는 뜻이다. 그 통치는 필연만 있을 뿐 우연은 없다. 우연처럼 보인다면 통치를 모르는 자의 어두움이요, 섭리에 대한 무지일 뿐이다.
그러므로 ‘코로나 19’와 같은 상황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해야 한다. 온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이 지금 여기에서 통치하심을 고백해야 한다. 그 통치를 믿는 신앙인의 자세는 자크 엘륄(Jacques Ellull)의 말과 같다. 기독교인은 거대한 세계관을 가져야 하나 그 거대한 세계관의 실행과 나타남은 아주 작고 사소한 것이라는 내용이다. ‘코로나 19’의 상황에서 작고 사소한 질서를 지키는 특별함은 그 가치를 되새겨볼수록 귀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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