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코로나 19’ 바이러스 시대는 영화 같은 현실이 되었다. 그러한 영화는 종종 현실이 되면 안 된다는 전제 아래 만들어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익히 준비된 듯하면서도 오히려 더 당황하고 있다. ‘뉴노멀’(New Normal)이라는 용어가 반쯤은 체념의 의미로 다가온다. 홍수나 바이러스 창궐 같은 생태계 ‘재난’(災難)은 막을 수도 있는 이른바 인재적 ‘사고’(事故)와 분명 다르지만, 그 피해 과정은 많은 사고로 이루어진다. 낯선 환경이 준 변동성 때문에 정상적 활동들이 정상 경로를 이탈하여 수많은 사고와 피해로 이어지게 된다. 모임에서 집단 감염이나 급류에서의 배 전복 등이 발생한다. ‘재난’과 ‘사고’ 사이에 또 하나의 공통점이 또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회의 반응, 더 근원적으로는 인간 마음의 반응이다. 세계관은 거기에서 작용한다.
우리는 하늘의 새는 천부께서 키우시며 한 마리도 그분의 허락 없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들었다(마 10:29). 그러나 안 떨어진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머리털까지 세신 바 되었으나(마 10:30), 재난을 안 당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분의 허락하신 상황 밖으로 벗어나는 것이 아님을 믿는다. 믿음이 좌절할 만큼의 역경은 없다. 가끔 우리는 정말 어찌 해 볼 수조차 없는 가슴 아픈 일들에 망연자실하지만, 그 또한 불가피한 문제로 받아들이고, 살아 있는 동안 각자 분량 껏 인내하는 중에 지혜롭게 풀어갈 뿐이다. 재난과 사고를 최선을 다해 관찰하고 대응하고 배워가며 또 예측해 보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이 다 이런 믿음 안에 사는 것은 아니다. 재난이 나면 두려움에 싸이고 직면하기보다 눈을 감고 도망하고 싶어진다. 비극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원흉을 찾는데 그것은 일종의 외면과 도피 방법이다. 잘못한 사람을 찾으면 아주 별난 사람이라고 몰아가서 결국 우리를 그와 분리한다. 그래야 다시 그 일이 안 일어난다며 안심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안심은 자기기만이다. 현실을 바꾸지 못한다. 설익은 저널리즘은 마찬가지로 이를 전파하다 못해 아예 앞장서고, 범인을 찾아 제단에 바치는 인신공양으로 종결시키곤 한다. 이 ‘탓하기’, 또는 ‘비난하기’(Blaming) 습관은 오늘날 안전 전문가들이 가장 우려하는, 만연한 해악이다. ‘탓하기’와 짝하는 것은 ‘하인드사이트’(Hindsight), 즉 ‘사후적 지혜’이다. 어떤 일이든 지나고 나면 다 자명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누가 용접하다 불냈다는 기사가 뜨면 그 아래 댓글들이 뻔하다. 어이없는 일이고 정상이라면 안 그랬을 것이라는 질타가 즐비하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고쳐지는 것이 없다.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개인 똑똑이는 많은데 다 합치면 어리석기 짝이 없다. 제대로된 현대적 사고 분석은 겸허한 것이 기본이다. ‘나’도 그의 상황이라면 그랬을 수도 있다고 이해하기 전에는 사고(事故)를 이해한 것이 아니다. 이해되지 않은 ‘사고’는 다시 나게 되어 있다. ‘그’와 ‘나’를 다르다고 하기보다 같다고 보는 관점이 지혜롭다.
사실 현대의 ‘재난’에는 원흉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찰스 페로(Charles Perrow)는 1984년 ‘정상 사고’라는 개념을 제안했고 이것은 만연했던 흑백론적인 ‘사고’ 이해의 패러다임을 파괴하였다. 1990년대 이후, 안전 분야에서는 원흉 찾기에 나서면 뒤떨어진 사람이다. 대부분 ‘사고’는 인간이 원인으로 지목된다. 늘 개탄의 대상이 되는 이른바 인재이다. 그러나 현대 안전 과학은 인간의 실수라는 것은 ‘재난’의 원인이 아니라 관련된 모든 것의 약점에 의한 결과로 본다. 내가 아는 예수님은 세상에서 ‘사고’의 원인으로 종종 지목된 사람들을, 그가 변호했던 쫓겨나고 벗겨지고 구박받는 소자로 보실 것이다. 그 소자의 사정을 이해하시고, 그를 함부로 판단하고 손가락질하는 자들에게 경고하실 것이다.
‘코로나 19’ 바이러스 사태의 와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이 난제 발생 또는 확산에 연루된 것으로 지목된다. 그들만 없었으면 얼마나 달랐겠는가 하는 생각에, 사람들은 당연한 듯 또는 정의로운 듯 돌을 든다. 그러나 ‘사고’와 ‘재난’ 가운데에서도 흔들림 없는 하나님의 뜻은 인간 존중에 초점이 있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불평과 원망과 비난으로 우매해지는 대신, 현실을 수용하고 슬기와 박애와 인간 존중으로 매일 매 상황에서 최선의 일을 해야 하며, 그것을 아주 참을성 있게 지속해야 한다. 그래서 현대적 시스템 안전의 중심은 안전 탄력성이다. 슬기롭게 관찰하고 유연하게 스스로를 변화시키며 경험으로부터 겸허하게 배우고 최선을 다해 오는 변화를 예상하는 상시적이고 성실한 사이클이 탄력성 즉 ‘레질리언스’(resilience)의 요체이다. 이것은 누적된 경험과 과학적 사고가 빚은 지혜이면서, 또한 하나님 섭리의 반향으로 이해된다. 하나님의 뜻과 인간 세상의 참된 원리가 일치하며, 옳은 가치와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가 바른 길로 이끈다는 것이 창조와 사랑의 아버지를 믿는 기독교 세계관일 것이다.
우리는 지금 ‘코로나 19’에 대응하며 세계 각국이 이 슬기에 대해 평가받는 현상을 보고 있다. 안전문화의 시작은 공정 문화이다. 이는 바른 말이 귀 기울여지고 성실함이 괘씸죄로 배척되지 않는 문화를 말한다. 그러면 배움이 있게 된다. 그리고 소통이 되고 투명해지고 신뢰가 생기고 그것을 토대로 기꺼이 행동할 수 있게 된다. 서로 ‘통함’에 안전이 있고 서로 ‘막힘’에 위험이 있다. 따라서 인간 압제의 불통 사회와 자기중심의 자만하는 문화는 늘 위험성이 높다. ‘코로나 19’의 시대는 우리가 스스로의 문화를 돌아보고 슬기를 챙길 시간을 주었다. 폭주하던 재물 숭배의 세상에 인간 가치에 눈 돌릴 틈을 주신 것이라고도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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