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무슨 배짱이었는지 싶지만, 나는 40세가 되던 해에 유학을 떠났다. 어려서부터 막연히 미국 유학은 한번 해봐야지 싶었다. 그 설레임은 필라델피아에 도착해서 각종 걸림돌에 걸려 넘어지면서 사라졌다. 첫 걸림돌은 언어 장애였고, 그다음은 재정적 압박이었다. 어찌 그뿐이었을까? 당시 내 모습을 그리자면, 아직도 밤새워 울고 불며 간증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이 지면의 당초 목적이 아니기에 자제한다. 다만 그 시절 내가 ‘신앙과 삶의 통합’이란 개념을 이해하기 시작한 계기가 된 짧은 기억에 대해 나누고 싶다. 동역회와 인연은 돌이켜보면 바로 이 시점부터 시작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첫 학기 수강한 강좌명은 ‘교육철학’ 관련 수업이었던 듯싶다. 학교의 안내대로 신청해서 들어가고 보니, 담당 교수 맥컬로우(Dr. Marti MacCullough) 박사는 미국 학생들조차 피하고 싶어 하는 어려운 수업과 시험으로 명성이 자자한 분이었다. 후회는 이미 늦었다. 80년대 초, 국립 교대에서 공부한 것이 전부인 나는 수강 취소라는 개념조차 몰랐다. 수업에 성의라도 보이고 싶어서, 교재들을 달달 외우고, 매주 강의실 맨 앞자리에 앉아 교수님을 거의 노려보다시피 하며 고군분투했다. 그 덕분인지 제임스 사이어(James Sire), 데이비드 노글(David Naugle) 등의 기독교 세계관 논의들을 약 30% 정도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었던 어느 날, 교수님이 강의 중간에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으셨다. 질문의 핵심은 나의 기독교 신앙이 교사로서의 가르치는 일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보지 못했다.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고, 선교회 활동도 했고, 기독교 학교의 교사이기도 했지만, 나는 그저 교회에 열심히 다니던 전업 교사였다. 유학도 교사직을 좀 더 유능하게 해 볼까 싶어서 선택했을 뿐이었다. 적지 않은 기간 교사로 일하면서도 학생들을 가르치는 방식이나 내용에 대해 신앙적으로 고민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난데없는 교수님의 질문을 통해 직면하였다.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말문이 막혀 눈물을 글썽이던 나에게 교수님이 더 당황하며 얼른 다른 학생에게 질문을 넘기셨다.
나는 그러한 계기로 ‘신앙과 삶’의 통합을 향한 순례자의 여정에 합류했다. 교회다니는 교사가 아닌 그리스도인 교사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보려는 노력을 시작한 것이다. 자연스럽게 교육 활동 자체에 대한 인식의 전환도 있었다. 그리고 부모님의 강요에 가까운 권유로 교대에 입학했던 내가, 마침내 하나님께서 교사로 부르셨다는 소명의식도 가지게 되었다.
한국으로 돌아와 교장직을 수행하면서, 또 교육대학원 강의에서 그날의 당황스러웠던 기억들을 자주 이야기하며 후배 교사들을 격려해왔다. 다행히 요즘 젊은 그리스도인 교사들은 나처럼 무지하게 교직에 들어서지는 않는 것 같다. 여러 그리스도인 교사 단체들을 통해, 수업의 내용과 전달 방식을 기독교 세계관에 입각해서 통합하는 연구 모임들의 덕분일 것이다. 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는 오래 전부터 이러한 기독교 세계관 통합 논의에 이론적 근거와 방향을 제공하는 기여를 해왔지만, 당시만 해도 나는 구체적인 동참은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당시 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의 기관지였던 <월드뷰>의 표지 인물이 되는 외국 교수 한 분을 인터뷰해서 기사로 써달라는 의뢰를 받아, 동역회의 사역에 처음으로 동참하게 되었다. 나는 교사이자 교장으로서, 그리고 교육학 교수로서 제한된 영역에만 살고 있었지만, 동역회의 다양한 전공의 전문가들이 자기 연구영역과 기독교 신앙을 공적 삶의 영역에서 통합해서 드러내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고자 애쓰는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무엇보다 소속된 교육분과에서, 현장 교사들을 비롯한 젊은 연구자들이 기독교 세계관에 입각한 교육 연구를 쏟아내는 학회 활동에서, 무지했던 과거 내 모습을 돌아보며 도전을 많이 받았다.
동역회가 최근 잠시 아픔을 겪는 과정에서는 나 역시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그 진통의 시간마저도,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 아래 있었다고 믿는다. 그 과정들조차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문제들을 극복하는 신앙과 삶의 통합 여정이었음을 감사하고 있다. 새 기관지 <신앙과 삶>의 편집위원으로 초대된 것도 내심 감사했다. 부족하나마 봉사할 영역을 허락해주셨다는 사실이 기뻤다. 편집회의를 위해 길을 나서며, 이전에 학생이던 교사들에게 기관지 내용을 소개하며, 내가 의미있는 길을 동행하고 있다는 생각에 감사했다. 그러나 2020년 총회에서 동역회의 등기 이사로의 선출된 일은 몸 둘 바를 모르는 과분한 사건으로 여겨진다. 다만 선후배님들의 격려에 힘입고, 또 주께서 쓰시고자 섭리하셨음을 믿고, 그저 함께 봉사하는 영광을 누릴 생각이다.
얼마 전, 나는 모든 풀타임 직무에서 자유롭게 되었다. 소수의 대학원 강의, 오랫동안 마음에만 품었던 어린이 책 집필 등으로 시간을 보내는 이 프리랜서 생활은 여유롭고 평안하다. 그러나 가끔 꼼짝없이 퇴직자의 길에 접어들었다는 두려움도 느낀다. 이제 다양한 현실의 어려움들이 굳이 나를 흔들지 않아도 저절로 내 무릎이 흔들리는 나이가 되었다. 폴 트루니에(Paul Tournier)가 <인생의 사계절>에서 묘사했던, 겨울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가고 있다. 평생 교육자로 살아온 이 세상이라는 곳간에 다음 세대들을 위해 뭔가 좀 쟁여 놓아주고 싶은 바램이 있다. 동역회 사역에 동역하다 보면 그 일이 조금씩은 더 가능하겠지 싶어 새삼 감사하고 있다. 처음부터 원하거나 의도하지 못했던 이 섬김의 자리이지만, 동역회 가족들과 함께 여기까지 신실하게 인도해주신 주님께 씩씩하게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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