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시민’이란 개념은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polis)를 구성하는 자유시민(polites)을 지칭한 데서부터 사용되었다. 도시의 중요한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들로 노예, 여자, 상인, 외국인은 제외되었다.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도 바울 사도의 경우에서 보는 것처럼 노예, 외국인 등 다른 사람들에 비해 상당한 권한과 특혜를 누렸다.
그러나 오늘날 일반화된 시민 개념은 12세기 전후 서양의 봉건제도 붕괴와 함께 출현한 도시 주민들에서 시작되었다. 봉건 군주를 위해 노동하고 그의 보호를 받던 농노(農奴)들 일부가 그 때 도입된 나침판으로 가능해진 원양 무역과 수공업으로 부를 축척하게 되자 교통이 편리한 강이나 바닷가에 집단으로 거주하면서, 군주에게 상당한 양의 조공을 바치는 대신 일정 정도의 자유를 얻고 기사(騎士)대신 그 때 도입한 화약을 이용한 총으로 치안과 방위를 감당하므로 일종의 자치령을 이룩하게 되었다. 베니스, 피사, 함부르크 등이 그런 도시들이었고 국민국가(nation state)의 효시와 민주주의의 씨앗이 되었다. 바로 그런 자치도시의 주민들을 ‘시민’이라 불렀다. 따라서 ‘시민’은 노예, 백성, 국민과는 다른 함의를 갖게 되었다. 단순히 어떤 정치 공동체에 소속되어 통치를 받는 사람들이 아니라 상당한 자유와 권한을 누리면서도 그 공동체를 자율적으로 운영하고 유지하는 책임을 지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군주국가, 식민지, 독재국가의 주민들은 백성, 국민은 될 수 있지만 시민은 될 수 없다. 오직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주민들만 시민이란 자격을 누릴 수 있다.
이런 시민 개념은 성경적 인간관에 가장 잘 어울린다. 모든 사람은 동일한 권리와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보편인권 사상이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동일하게 고귀하다는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해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동일한 권리를 누리려면 그것을 보장할 수 있는 힘과 권위가 있어야 하는데, 그 권한이 한 사람이나 소수에게 국한되면 거의 확실하게 부패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평등한 자유와 권리 향유가 어려워진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평등한 자유와 권리를 안정적으로 누리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이 책임도 동일하게 지는 자유민주주의가 최적의 제도라 할 수 있다. 자유민주주의는 이제까지 인류가 개발한 정치제도 가운데 가장 우수한 것이고, 성경의 인간관에 가장 충실하다 할 수 있다. 왕권신수설이 지배했던 16세기에 이미 칼뱅은 민주주의를 선호한다고 한 것은 그가 성경의 인간관을 바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유세계에서 시민이 되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그 사실에 감사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잘 보존하고 바로 성숙하게 할 책임이 있다. 자유민주주의를 가장 위태롭게 하는 것은 시민들이 공적 의무보다는 사적인 이익과 권리 향유에 더 몰두하는 것이다. 이런 무책임을 이용하는 인기영합주의(populism)가 이미 여러 나라에서 재앙을 일으키고 있다. 베네수엘라의 비극이 그 가장 심각한 본보기고 아르헨티나도 비슷한 이유로 고통을 겪고 있다. 미국 복음주의자들의 85%가 지지해서 대통령으로 당선한 트럼프가 기후 온난화와 인종차별을 방치하고 자국 이익만 추구하므로 전 세계뿐만 아니라 미국 자체에까지 막대한 해를 입히다가 선거에 패배한 사실은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심각한 경종이 되어야 한다. 이미 한국 그리스도인들 일부가 미국 복음주의자들 비슷하게 이념의 우상을 섬기고 있고 시민사회의 건강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다. 최근 미국 복음주의 지도자들이 그 잘못을 깨닫고 후회하고 있다는 사실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성숙한 시민의식은 주어진 상황에 대한 정확한 지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사적인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공적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책임감이 필요하다. 성숙한 그리스도인 시민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희생적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믿음과 용기가 있어야 하고 그것이 인격으로 성화되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정치권력이나 경제력의 부패를 막기 위해 시민운동에 참여하고, 인류 전체의 생존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지구온난화 방지에도 적극적이어야 할 것이다. 환경오염에 대한 정확한 지식과 올바른 판단뿐만 아니라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에너지 절약 등으로 겪을 수 있는 불편이나 경제적 손실조차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하고 이를 위한 제도를 촉구하고 동료 시민들을 깨우치는 열성도 있어야 한다.
자유민주주의도 인간의 약점과 불완전한 운영으로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허용된 자유가 사적인 이익 추구에 남용되므로 경쟁이 치열해지고, 그 결과로 그 경쟁에 진 약자들은 불공정하게 불리한 위치로 내몰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시민들은 가난한 자, 장애인, 병든 사람들 같은 약자들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보이신 주님의 뜻에 따라 그들의 권리와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에 적극적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적 이익을 절제해서 추구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 시민에게 가장 두드러져야 할 특징은 개인적인 권리 향유에는 다소 소극적이라도 임무와 책임 수행에는 적극적이어야 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시민사회에서 십자가의 가르침을 반영하는 것이고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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