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던 주일이었다. 당시 나는 해군 장교로 군 생활하고 있었고, 주일마다 아버지께서 목회하시는 교회에 들러 예배를 드렸다. 농촌에 위치한 작은 교회가 보통 그러하듯이 우리 교회도 젊은 사람들이 없다 보니 주일이면 나도, 어머니도 늘 정신없이 예배를 준비해야만 했다. 워낙 바쁜 하루를 보내야 했기 때문에 예배를 마치면 어머니는 자주 피로와 두통을 호소하셨다. 그날도 어머니는 요즘 머리가 계속 아프다고 말씀을 하셨지만, 평소에도 자주 듣던 이야기였기 때문에 대수롭게 생각하지 못했다. 부대로 복귀하기 위해 나서는데 어머니가 마당까지 나오셔서 배웅해주셨다.
평소라면 별생각 없이 부대로 떠났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은 왠지 모르게 배웅하시는 어머니를 보며 한번 안아드리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렇지만 스물일곱이나 먹은 다 큰 아들이 엄마를 안아드린다는 게 남사스럽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내 마음을 접었다. 왜 어머니를 안아드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품은 채 인사만 드리고, 부대를 향해 차를 몰았다. 다음에 혹시 또다시 어머니를 안아드려야겠다는 마음이 든다면, 그때는 꼭 한번 안아드려야겠다는 생각만을 간직한 채, 발걸음을 재촉했다.
부대에 복귀한 다음 날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고 퇴근하는 길, 생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건 사람은 구조대원이었고 내용은 간단했다. 어머니가 직장 주차장에서 쓰러지신 채로 발견되었으며, 뇌출혈이 너무 심해서 위급한 상황이라는 것이었다. 삼십 초도 되지 않던 전화의 내용이 청천벽력이 되어 내 가슴 한복판에 떨어졌다. 부대와 병원은 약 두 시간 반 정도 거리였다. 내가 어떻게 운전해서 병원까지 갔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그저 왜 어제 어머니를 따뜻하게 안아드리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왜 나는 사랑할 수 있었을 때 사랑하지 못했을까?
그날 이후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회복과 관련해서는 여전히 헤쳐나가야 할 난관들이 산적해 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분명 어머니의 생명을 이 년 반이 지난 현재까지 연장해주셨다. 어쩌면 나와 우리 가족들이 모두 어머니에게 후회 없이 사랑할 수 있도록 한 번 더 기회를 주신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하나님이 왜 어머니에게 이런 질환이 발생하도록 내버려 두셨는지, 어머니가 과연 다시 건강을 정상적으로 회복하게 되실지에 대한 명확한 답을 찾지는 못하였다. 그 때문일까. 하나님께 불평하는 마음이 불쑥 올라오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느끼는 바는 하나님께서는 “사랑할 수 있을 때 후회 없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나는 그리스도인 청년 시민으로서 이 사회를 살아가는 기본자세 역시 후회 없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날 제자들을 모아놓고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아무런 죄도, 죽을 이유조차 없었던 그분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는 순간 자신을 배반하고 모욕하게 될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심지어 군중들이 자신들의 죄를 담당하는 메시야가 누군지도 알아보지 못한 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아우성치는 상황에서조차 무한한 사랑을 끝까지 베풀어주셨다. 그리고 그 크신 사랑으로 여전히 우리 모두에게 후회 없는 사랑을 베풀고 계신다. 예수께서 베푸신 사랑의 크기를 아는 사람이라면 십자가의 사랑으로 나의 이웃을,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를 사랑으로 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근래에 들어 한국교회가 큰 어려움이 봉착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코로나 19’ 상황이 심화되면서 그 비난의 화살이 한국교회로 향해 쏟아졌다. 이제는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것은 물론이요, 공공장소에서 성경을 꺼내는 것 자체도 상당히 큰 어려움이 되어버렸다. 심지어 우리 교회에 다니시는 어르신의 말씀에 의하면, 교회에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동네 경로당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거나 말도 걸지 않는 왕따 현상도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성경적 가치에 따라 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이제는 혐오와 몰상식의 상징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인권 관련 논의의 중요성이 성경적 가치의 중요성을 넘어버릴 것에 대해 경각심을 갖고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믿음을 지켜나가기가 참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예수께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요청하시는 바는 분명하다.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아무리 외롭고 억울하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는 사랑하는 것이지 미워하고 원망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핍박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 예수께서 알려주신 삶의 방식이다. 예수께서 끝까지 그리고 후회 없이 우리 죄인들을 사랑하셨던 것처럼, 우리 역시 후회 없이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느끼고 있는 원망과 두려움을 토로하기에 앞서, 예수께서 우리 마음에 가득히 주신 사랑을 나누고 전하는 의무에 충실해야 한다. 나는 우리 한국교회에, 그리고 시민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제안하고 싶다, 우리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후회 없이 사랑하자!”
이용약관 | 개인정보 취급방침 | 공익위반제보(국민권익위)| 저작권 정보 | 이메일 주소 무단수집 거부 | 관리자 로그인
© 2009-2024 (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고유번호 201-82-31233]
서울시 강남구 광평로56길 8-13, 수서타워 910호 (수서동)
(06367)
Tel. 02-754-8004
Fax. 0303-0272-4967
Email. info@worldview.or.kr
기독교학문연구회
Tel. 02-3272-4967
Email. gihakyun@daum.net (학회),
faithscholar@naver.com (신앙과 학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