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우리는 즐거움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늘 새로운 뉴스거리를 찾아다니고, 더 새로운 ‘인싸’가 되는 법을 연구한다. 그렇게 얻은 즐거움은 무료한 일상을 극복해내는 자극이 된다. 그러나 이 세상이 주는 짜릿함의 유효기간은 짧다. 그렇기에 우리는 다시 반복되는 일상에서 더욱 새로운 자극을 갈망하며 살아간다. 성공을 추구하며 얻는 즐거움도 마찬가지이다. 성공이 이 세상을 가장 잘 누릴 수 있는 방법이라는 생각에 맹목적으로 사로잡힌 듯이 그것을 향해 달리지만, 이는 삶을 열심히 살게 하는 원동력이 될 수는 있으나, 결국 나를 짓누르는 대가로 얻는 즐거움이다. 그러나 하늘 아버지께서는 세상의 ‘인싸력’이나 ‘성공’이 주는 즐거움과는 질적으로 다른 인생의 짜릿함을 예비해놓으셨다.
나 역시 모태신앙이지만 말씀이신 예수님을 그 말씀을 통해 인격적으로 만나기 전까지의 세상의 짜릿함을 맹목적으로 좇으며 누군가의 자랑이 되고자 하는 삶을 추구했었다. 그 누군가는 나 자신, 부모님, 그리고 심지어는 하나님이었다. 하나님의 자랑이 되는 삶은 우리가 마땅히 추구해야 할 바이나, 그것을 추구하는 이유가 세상과 같다면, 이 세상 모든 평범한 것들과 약한 것들은 하나님의 자랑이 될 수 없음이다. 하나님은 나에게 ‘자랑’이라는 짐 대신 아버지를 따름으로 얻는 ‘자유’를 허락하셨다. 그 자유는 지어진 목적대로 사는 즐거움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성공을 열망하는 삶에서의 회복을 명하심으로 나의 꿈을 되사신 그분 안에서만 발견되는 즐거움 말이다.
그 목적을 아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다. 그분의 꿈 안에는 사랑이 있고, 연대가 있으며, 다른 이를 향한 긍휼이 있다. 그분이 사랑, 연대, 긍휼의 아버지시라면, 그분이 나를 지으신 이유 역시 분명하다. 필자는 현재 다른 이를 향한 재물, 재능과 삶 더 나아가 마음의 빈공간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기부문화의 확산과 정착이다. 나의 업이 직접적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기에 나는 축복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우리나라가 특별히 어떠한 부분에 인색해서 이 문화의 정착이 늦어졌다고는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우리의 이례적인 고속 성장과 그에 따른 분주함이 우리 스스로를 우리를 지으신 아버지의 마음과 동시대를 살고 있는 연약한 이들에게 집중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아버지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더라도 스스로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의 선한 일을 할 수는 있고, 기부문화가 크리스천만의 것은 아니지만, 먼저 그 긍휼의 주인되시는 분을 아는 자들이 나눔을 위한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이 마땅한 순서라고 생각한다.
언젠가 내가 존경하는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연대의 용기가 부족하고, 사랑이 고갈된 시대’ 라고. 이것이 우리가 원해서 갖게 된 모습일리는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점점 더 부정하고, 자신의 삶에만 몰두하여 살아간다면 “동무를 불러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는”(마11:16-17) 모습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물론, 이 시대의 긍휼 없음은 단순히 기부문화의 정착으로만 바뀔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정말로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모든 일의 중심과 그 결론에 있어야 할 것은 복음뿐이다.
기부와 나눔에는 당연한 희생이 따른다. 그러나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 된 우리의 안식을 위해서 그 완벽한 안식의 자리에서 내려오셔서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안식을 보이셨다. 당신의 피조물들의 안식이 없이는 그분 자신의 안식도 없으신 것처럼. 그렇다면, 제자 된 우리 역시 그렇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그리스도인 청년으로 사는 삶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것을 위해 지면을 허락받았다. ‘그리스도인’ 그리고 ‘청년’으로서 자신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를 아는 것은 삶을 뒤바꾸는 깨달음이다. 그러나 다음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른 이 역시 그 삶의 목적을 갖고 지음 받은 자임을 아는 것으로 이어져야 하지 않을까. 특히 연약하고 소외당하여 그 목적을 알아낼 기회조차 얻기 희박한 자들의 삶의 목적 말이다. 나의 영, 혼, 육과 꿈을 회복하신 하나님은 그분이 지으신 모든 사랑하는 자들의 영, 혼, 육과 꿈 역시 회복되기를 원하신다. 그렇기에 아버지의 창조물 중 어느 하나라도 고통받고 있다면, 그것은 아버지의 뜻일 리 없다. 아버지께서는 그분과 마음을 공유한 자들이 이 망가진 것들을 회복시키기시는 사역에 동참하기를 원하신다. 결국, 나의 회복은 다른 이의 회복을 위함이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인하여, 내가 누군가의 회복을 위한 길에 동행할 수 있는 축복의 통로가 된 것과 다른 이도 그 기쁨의 자리에 초대하는 것이 바로, ‘세상이 줄 수 없는 짜릿함’이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을 지명하여 부르셨고 제자의 길을 완주하기를 기대하신다. 나는 아직 그 길을 맛만 보았을 뿐이지만, 지금까지 인도하시며 당신의 말씀과 믿음의 선배들을 통한 삶의 지침으로 나의 길을 만들어 가셨던 아버지께서 준비해놓으신 그 선한 길을 기대함으로 나아간다.
앞으로 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보호받지 못하는 이주 노동자들, 이주 청소년들 그리고 난민들이 조금 더 나은 삶을 사는 세상, 그리고 삶의 목적을 발견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삶을 사는 데에 동참하는 일을 꿈꾸고 있다. 나를 부르시는 아버지의 완벽한 선하심을 믿기에, 그분께서 부르시는 곳이 어디든, 언제이든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 나의 것을 채우느라 분주하지 않은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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