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3세기에 이탈리아를 강타한 전염병으로 로마에서는 하루에 5,000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한다. 그로 인해 로마 제국의 기반은 크게 약화되었지만, 이교도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오히려 대단히 개선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디오니시우스(Dionysius, bishop of Alexandria)의 글은 그 이유에 대한 단초를 제공해준다.
“대부분의 형제 그리스도인들은 무한한 사랑과 충성을 보였으며 결코 자신을 아끼지 않고 서로만을 생각했다. 그들은 병자들을 책임지고 그들의 모든 필요를 돌보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을 섬겼으며 그들과 함께 이생을 고요하게, 행복하게 떠난다. 그들은 질병에 걸린 다른 사람들에 의해 감염되었고, 이웃들의 병을 끌어내고 그들의 고통을 즐겁게 받아들였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간호하고 치료하는 과정에서 죽음을 자신에게 옮기고 대신 죽었다.”
전염병은 우리 자신의 필멸성과 연약함에 대한 생각을 강화시키는 동시에 반문화적이고 반조건적인 사랑을 표현할 기회를 부여한다.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전염병이 성행하자 그리스도인다운 면모를 드러냈다. 자기만 살겠다고 발버둥치는 현실에서도 오히려 감염된 이들을 사랑으로 보살핀 것이다. 종교사회학자 로드니 스타크(Rodney Stark)가 밝혔듯이 120만 명에 불과하던 그리스도인이 무려 6백만으로 증가하는 기록을 보였다. 이 사실은 예기치 못한 ‘코로나 19’에 대한 우리의 대처가 어떠해야 할지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코로나 19’의 위기를 얼마나 지혜롭게 대처하였는지는 곧 판가름 날 것이지만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팬데믹 상황에 대한 모범을 보여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예술가들도 이런 때일수록 그리스도인다운 면모를 보일 좋은 기회로 여겨진다. 얼마 전 개최한 기독교 작가들의 모임 ‘아트미션’의 <기억하는 사람들>이란 전시는 ‘가장 작은 자에게 하는 것이 바로 내게 하는 것’(마 25:40)의 말씀에 기대어 우리 사회의 외롭고 힘없는 사람들과 깨어지기 쉬운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화폭에 담았다.(김현희, 그림1)
김현희는 주위의 나무 폐품과 철사로 십자가 이미지를 만들어 약한 자들을 소중히 여기시는 그리스도의 자비를, 정해숙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고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치유와 회복의 마음을 담아 실어냈고, 최진희는 <광야에 서다>를 유리 작품을 통해 좌초되고 시련을 겪는 사람들을 담았다. 조혜경의 <터치>는 병든 채 버려진 또다른 상처입은 여인 시엥에게 위로와 사랑의 메신저이기를 자처한 반 고흐의 삶을 통해 지금도 하늘의 은총이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임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했고, 역사적 상흔을 지닌 유적지를 긍휼의 마음으로 그려온 김미옥은 미얀마의 빈민촌 아이들과 나일강을 끼고 있는 이집트 주민들에 각각 성령의 단비가 부어질 것을 소망하는 그림을 선보였다. (조혜경, 그림2).
그런가 하면 폐지를 이용해 꽃의 이미지를 만들어 죽은 사물에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을 해온 송지연은 <마라나타>를 통해 지금의 아픔과 슬픔이 끝나고 소망의 그날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이혜성은 마른 잎사귀를 소생시키시는 주님의 만지심을, 안혜성의 <사막>은 지금의 고난의 날들이 종국에는 보석같은 삶을 가져다주리라는 믿음을, 서자현은 코로나 19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작품을, 장지희는 서로 다른 사람들을 벗으로 삼는 공동체를 암시하는 추상 작품을 각각 출품하였다. 이 작가들은 인간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긍휼한 마음과 작가들이 이웃을 대하는 마음을 작품에 담았다.(송지현, 그림 3).
기독교 작가들이 공감적 감수성을 갖고 이웃에 다가서는 작품을 선보인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빈민목회’로 널리 알려진 이연호 목사(1919-1999)가 6.25 전쟁으로 인해 부모를 잃은 아이들, 장애인들, 지아비를 잃은 여인, 부랑아들을 수채와 펜으로 그려 시대의 아픔을 표현한 것이나 서민 화가 박수근(1914-1965)이 실직자들과 미화원들, 노상의 사람들, 과일 파는 여인들을 그려 사회의 응달진 부분을 강조한 것은 그들의 삶의 애환에 대해 공감대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공동체에 위기가 닥쳤을 때 위기에 빠진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느냐 하는 문제는 지금도 ‘선한 사마리아인’을 찾고 계신 예수님의 사인이 아닐까.
어디에도 발붙일 곳이 없던 사람들을 시대를 함께 사는 나의 이웃으로 끌어안는 시각은 지금도 유효할 것이다. ‘코로나 19’로 인해 어려운 처지에 놓이고 상실감을 겪는 시대에 기독교의 정신을 발휘하는 작가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무척 값진 경험이었다. 특히 요즘 같은 시기에는 주위 사람들과 함께 아파하고 슬퍼하는 공감적 감수성을 나누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그런 책임 있는 그리스도인이 늘어난다면 사람들이 기독교인에 대해 품었던 의문도 얼마간은 해소시켜 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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