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재난’, ‘위기’, ‘고통’ 같은 단어는 상황에 대한 ‘서술적인’(descriptive) 표현이기보다는 그것들을 극복하고 제거하라는 요청이며 상황에 대한 ‘명령적인’(prescriptive)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약 1700만 명 이상의 생명을 앗아갔고 계속해서 앗아가고 있는 ‘코로나 19’는 그런 재난이며 위기다. 이렇게 심각한 재난은 전 세계 모든 사람, 모든 기관에 예외 없이 긴급하게 그 극복을 요청한다. 교회는 여기서 예외가 될 수 없다.
생명을 살리는 일에는 교회가 오히려 앞서야 한다. 사람의 생명이 천하보다 더 귀하다고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이 말씀하셨고(막 8:36), 성경도 일관되게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인권 존중 사상은 기독교적 전통에서 비롯되었고, 그것은 오직 사람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해 있다. 그런데 막상 그것을 제시하는 성경 구절인 창세기 9장 6절은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로 되어 있어, 하나님의 형상은 우선적으로 사람의 생물학적 생명이 소중한 이유임을 제시하고 있다. 영생도 중요하지만 우선 사람의 육체적 생명이 보존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형을 받을 정도로 범죄하지 않은 사람들이 전염병에 걸려 목적도, 보람도 없이 대대적으로 죽어가는 것을 예수님은 결코 방관하시지 않으셨을 것이고, 따라서 교회도 그렇게 해선 안 된다.
역사적으로도 순수한 성경적 신앙을 유지했던 교회는 생명을 살리는데 적극적이었다. 주후 2세기 로마에 전염병이 창궐했을 때 핍박받던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이 병에 걸려 죽게 내버려진 사람들을 구제하므로 불신자들의 칭찬을 받았고 믿는 자의 수가 늘어났다. 1527년 독일에 전염병이 창궐했을 때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했던 루터는 피신하지 않고 남아서 환자들을 돌보면서도, “나는 감염되지 않기 위하여, 그리고 혹시 내가 조심하지 않으므로 다른 사람을 감염시켜서 그들을 죽게 하지 않기 위해서 내가 꼭 필요하지 않은 곳에는 가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이웃에게 원망을 들을 일이 있으면 먼저 화해한 다음 제물을 드리라고 가르치신 예수님은 결코 이웃의 생명을 위험에 빠트리면서 예배드리라 하지 않으실 것이다.
이번 위기에도 한국 교회가 대구 동산병원처럼 앞장서서 전염병 치료와 확산 방지에 발 벗고 나서서 최선을 다했더라면, 그동안 실추되었던 명예도 회복하고 교회 성장도 촉진되었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대면 예배를 금지하는 방역 대책에 항의하면서 집단감염을 일으킴으로써 시민들의 비난과 조롱을 받지 말고, 전 교회가 일어나서 이 재앙이 하루빨리 지나가도록 간절히 끊임없이 기도하고, 누구보다 더 방역에 앞장서며, 이웃이 감염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도 감염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비윤리적인 것은 ‘악을 행하는 것’(作爲, commission) 뿐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不作爲, omission)도 포함한다. 사람을 죽이는 것만 살인이 아니라, 살릴 수 있는 사람을 방치해서 죽게 하는 것도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다. 우리는 바리새인들처럼 ‘동기 윤리’에만 익숙해져서 살의(殺意)가 없으면 살인이 아니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6계명의 목적은 우리가 살인하지 않는 의인이 되는 것 못지않게 이웃이 살해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데 있다. 한국의 최대 종교인 기독교가 방역에 소극적이고 심지어 방해가 되는 것은 교회의 본분을 무시하는 정도를 넘어 심각한 범죄가 될 수 있다.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더 많이 감염되고 죽는다 한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한국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더 큰 어려움을 겪고 취약계층이 더 많이 감염에 노출되고 있다. 그러므로 그렇게 정의롭지 못한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한국 교회가 위기 극복에 적극 나서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지금 당장 굶고 앓는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 어려움을 당한 교회와 성도를 돕는 것은 물론이고, 국내, 국외에서 힘들어하는 모든 사람에게 도움의 손을 내밀어야 한다. 유다 지역에 흉년이 들었을 때 안디옥교회와 마케도니아, 아가야 교인들이 연보를 모아 보냈다. 신약성경에 언급된 모든 연보는 구제헌금이고, 주로 재난 때에 이뤄졌다. 교회의 헌금을 가장 성경적으로 사용할 때가 바로 이런 재난의 시기다.
방역, 구제 활동과 함께 교회는 하나님께서 왜 이때 인류와 교회에게 이렇게 무서운 재앙을 허용하시는지 그 이유를 찾아야 한다. 또한 의인 열 사람의 기능을 못한 것에 대해서, 그리고 아브라함이 소돔을 위하여 한 것처럼 간절하게 기도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심각하게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이유가 우리만이 아니라 세상에도 있다면 그것을 세상에 알리고 고치라고 권고하며 대신 회개할 의무가 있다. 그것이 교회의 선지자적, 제사장적 사명이다.
인류가 저지른 잘못은 물론 한둘이 아니다. 그 가운데서도 쾌락과 편의를 지나치게 추구하다가 자연을 파괴해 버린 것이 가장 심각하다. 지금의 재앙이 선진국이나 중진국에 더 심각한 것도 그것을 암시한다. 앞으로 기후변화가 초래할 재난은 단순히 많은 사람의 죽음 정도가 아니라 인종 자체를 종말로 이끌 것이라고 전문가들이 지적하고 있다. 이를 경고하고 먼저 회개하며 예방하는데 앞장서는 것이 오늘의 교회가 해야 할 시급하고 중요한 사명일 것이다.
이용약관 | 개인정보 취급방침 | 공익위반제보(국민권익위)| 저작권 정보 | 이메일 주소 무단수집 거부 | 관리자 로그인
© 2009-2024 (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고유번호 201-82-31233]
서울시 강남구 광평로56길 8-13, 수서타워 910호 (수서동)
(06367)
Tel. 02-754-8004
Fax. 0303-0272-4967
Email. info@worldview.or.kr
기독교학문연구회
Tel. 02-3272-4967
Email. gihakyun@daum.net (학회),
faithscholar@naver.com (신앙과 학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