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목사들의 목사’로 불렸던 마틴 로이드 존스(Martyn Lloyd Jones) 박사는 기독교가 구원론의 시대를 지나 곧 교회론의 시대를 맞이할 것을 예고했다. 그의 진의가 어디에 있었는지 자세히 알아가야 할 숙제는 여전하나 정확한 예고였던 것만은 틀림없는 듯 보인다. 새천년 이후 지난 두 번의 십년 동안 한국교회는 신시대에의 적응을 핑계로 다양한 목회적 방법론을 도입하고 계발해 왔다. 이에 발맞추어 사역자들 역시 4차 산업혁명이라는 기치 아래 다양한 목회 기술을 습득해야만 했다. 효과가 없지 않았다. 박수와 갈채 그리고 성공이 눈앞에 신기루처럼 아른거리기도 했다. 지난 20년은 그런 풍요의 끝자락의 그늘이었던 듯싶다.
‘코로나 19’는 지구촌 곳곳에 아픔과 상처를 주어 기존 질서를 세차게 흔들고 있다. 교회도 예외이지 못했다. 확진자가 전국 교회 곳곳에서 속출했고, 진원지가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성급하게도 ‘포스트 코로나’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다. 각종 설문은 다양한 질문을 쏟아내나 대체로 한 방향으로 읽힌다. 온라인 플랫폼이 지속될 것인가에 관한 논의에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기술적으로 어떻게 효과성을 극대화시킬 것인가에 대한 전망을 내놓으려 한다. ‘코로나 19’가 우리 사회에 뿐 아니라 한국 교회에 남긴 상흔은 기술적 담론 이상의 것을 요청한다. 교회는 그 어느 때보다 이번 사태를 지나는 가운데 이야기의 중심에 있었고, 내/외부인들에게 고스란히 민낯을 드러냈다. ‘코로나 19’는 어떤 선배가 예고한 교회론 시대를 성큼 앞당겼음이 분명하다. ‘코로나 19’ 이후 우리는 매우 분명하고 거친 질문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교회는 무엇인가?”, “교회는 무엇을 하는 곳인가?”, “교회가 가르치는 것은 무엇인가?”, “교회는 어떤 일을 하는 공동체인가?” 등 상당히 묵직한 질문 앞에 서게 될 것이다.
우리 스스로 위의 질문들을 던져보자.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으며, 어떤 모습을 증언할 수 있을까? 사실 오늘날 교회에 대해 새삼 이야기하기 어려운 이유는 많은 이들이 암묵적으로 교회의 목적을 성장과 지위 상승이라는 왜곡된 의도에 두어 왔기 때문이다. ‘코로나 19’의 단 한 가지 순기능이 있다면 이 장막을 여지없이 걷어냈다는 데 있다.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 “교회는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성경은 그에 대해 단순하면서도 매우 분명한 답을 이미 주고 있다. 성경을 그래프로 상상해보자. 구약은 대체적으로 ‘수렴성’(convergency)을 보인다. 오실 메시아로 집중하고, 세워질 새로운 공동체로 수렴된다. 반면 신약은 ‘확산성’(divergency)을 보인다. 세워진 공동체는 복음의 전파를 위해 흩어진다. 오신 메시아는 이방으로까지 확산되어 증언된다.
교회는 ‘수렴성’과 ‘확산성’의 정점에 위치하여 얼개의 역할로 부름 받는다. 먼저 교회는 부름 받아 모이는 존재다. 그래서 예배하며, 교제하고, 훈련하게 된다. 이에 관하여 교회를 ‘예배 공동체’ 즉 ‘사귐의 공동체’라 명명하기도 한다. 교회가 모여 예배하며 교제하지 않는다면, 본질적으로 교회일 수 없다. 그렇기에 현 ‘코로나 19’ 시국은 교회에 심각한 타격을 준 것이 분명하다. 교회는 예배와 사귐의 지속을 위하여 가능한 모든 기술적 자원을 동원하고 있다. 예배가 유튜브(Youtube)로 중계되고, 줌(Zoom)이 소모임을 위한 방을 내주었다. 감사하게도 21세기의 영상기술은 값비싸고 복잡한 장비가 아니더라도 예배 중계를 가능하게 한다. 이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현시점에서 누릴 수 있는 일반은혜임이 분명하다. 예배와 사귐을 위한 기술적 노력은 21세기 판 예배당 건축이라 불릴만하다. 그러나 기술사용에 관한 경고를 주목해야 한다. ‘의미있는’ 뉴스보다는 ‘재미있는’ 뉴스가 세상을 지배한다는 닐 포스트먼(Neil Postman)의 방정식, ‘기술과 종교의 반비례성’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얼마 전 유튜브 서버 다운이 간판 기사의 자리를 차지한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매체는 중립적이지 않고 그 자체가 곧 ‘메시지’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기술이 모이는 교회의 예배를 도울 수 있음에도, ‘예전적 지혜’(liturgical wisdom)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
교회는 또한 확산되어 흩어지는 공동체다. 이에 관하여 어떤 이들은 교회를 ‘선교적’ 혹은 ‘공교회성’이라 명명한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선교적이다. ‘코로나 19’는 교회의 선교적 특성에 관한 시험대가 되었다. “교회는 세상 속에서 어떠해야 하는가?”, “교회의 시민으로서의 역할은 어디까지인가?” 등 선교적 교회의 본질 앞에 서게 되었다. 전염병 앞에 교회가 현장 예배를 잠시 멈출 수 있는 근거도 여기에 있다. 교회의 ‘수렴성’만을 고려했다면, 예배는 멈출 수 없었을 것이다. 교회는 주님의 명령, “내가 너희를 보내노라”에 따라 흩어져 확산하는 공동체다. 교회는 역사 속에서 전 지구적 위기의 때에도 구제와 돌봄을 멈추지 않았다. 교회가 시민과 국가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희생을 담당했다.
감사하게도 종암제일교회는 당회가 모든 교우들의 뜻을 모아 계획에 없는 작지 않은 지출을 결정하여 실행할 수 있었다. 월세가 높은 서울 경기 지역 개척교회에 선교비를 보냈으며, 인도네시아 선교지의 교회 건축에도 상당한 힘을 보탰다. 교회 안팎에 경제 위기를 겪는 분들에 대한 손길도 잊지 않았다. 비대면 예배로 인하여 예산안 수입이 다소 줄어든 상황에서 쉽지 않은 헌신이었음에도 당회원들은 기꺼이 한 마음으로 동참했다. 교회는 여전히 흐린 안개 속에 있는 듯하다. 어떤 분의 한탄처럼 방역전문가는 어느새 선지자 역할을 하고 있다. 교회는 분명 질문 앞에 서 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교회는 교회의 본질에 대한 물음을 피할 길이 없다. 교회가 모이며 흩어져 예배하고 섬기는 공동체로서 순결과 지혜로 무장하여 푸르고 푸른 계절이 도래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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