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저와 여러분에게 있어 교육은 늘 우선순위입니다... 학교는 아이들이 있어야 할 가장 좋은 곳입니다.”(My priority, our priority, remains keeping people in education... school is the best place for children to be).
지난 11월, ‘코로나 19’ 관련 2차 ‘락다운’(Lockdown)을 앞두고 영국 수상 보리스 존슨(Alexander Boris de Pfeffel Johnson)이 한 말이다. 1차 ‘락다운’ 때는 학교 수업을 모두 온라인으로 전환했었지만, 2차 ‘락다운’ 때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물론 아이들의 교육권을 어른들의 생명권과 맞바꾸는 결정이라는 비판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여하튼 우리 아이는 하루도 빠짐없이 한 학기를 꼬박 등교했다. 한 공동체의 존재 이유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그 공동체가 내세우는 추상적인 가치가 아니라 실제적인 우선순위를 짚어볼 필요가 있기에 존슨의 말을 언급했다. 여러 말 필요 없이 이 말에서 영국 사회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는가 한다.
교회의 우선순위는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바로 모임이다. 다만 한국 사회가 모이는 교회보다 흩어지는 교회를 강조하는 분위기인 것은, 지금의 교회가 모이기에 힘쓰는 만큼이나 세상의 소금으로 잘 흩어지지 못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다. 실상 이는 한국 교회의 과제이지 모든 교회의 과제인 것은 아니다. 영국에 있는 교회들은 다르다. 여전히 모이려고 애쓴다. 일단 모여야 흩어지기라도 해볼 것 아닌가? ‘말씀 선포’(케리그마), ‘섬김’(디아코니아), ‘친교’(코이노니아) 이 모두는 모임에서 시작된다. 이렇게 교회의 우선순위가 모임에 있다면, 성도들이 있어야 할 가장 좋은 모임의 형태는 온라인인가 아니면 현장인가? 적어도 ‘코로나 19’ 시국에서는 온라인으로 보였다. 게다가 일부 신학자들은 온라인 공동체를 위한 신학적 토대를 마련하여 불편하게 생각하는 목회자와 성도들의 마음을 해갈해 주었다. 경쟁하듯 교단 차원의 온라인 교회 개척 훈련이 생겨나고, 교회의 존재 형태에 관한 담론은 축소된 채 온라인 모임을 전제로 그 부족함에 대한 담론을 형성하려는 시도들이 우후죽순이다.
그런데 여기서 오래전 ‘텔레비전 사역자’(televangelist)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물론 매체가 인터넷 기반으로 바뀌며 쌍방향 소통이 가능해졌기에 이전의 한계를 극복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국가 차원에서 장려한 ‘교육방송’(EBS)이 사교육 시장을 대체한 적이 없고, 사교육이 공교육을 대체한 적이 없듯, 온라인 교회는 현장 모임을 대체할 수 없을 것이다. 바로 대면 모임만이 가질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성탄절은 불효자도 부모를 찾아뵙는 날이다. 영국 정부가 ‘코로나 19’ 사태로 심각한 상황 속에서도 성탄 연휴 5일 만이라도 봉쇄조치를 일시 해제하려는 무리수를 뒀던 까닭도 바로 거기에 있다. 비록 런던 지역은 급격한 상황의 악화로 이마저도 물거품이 되었지만, 그 의도는 생각해 볼 가치가 있다. 직접 대면하는 만남을 온라인이 대체하지 못하는 경우는 거의 ‘사랑’과 관련이 있는 대상이다. 사랑은 사람과 사람이 실제로 ‘대면’하여 모일 때 힘이 생긴다.
학생은 학교에서 지식만이 아니라 우정을 쌓는다. 그 사랑은 온라인으로 할 수 없다. 그렇게 때문에 1타 강사의 인터넷 강의로 대체될 수 있는 것은 고시생의 공부이지 아이들의 우정이 아니다. 군대에서 애인과 매일 전화하던(합하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겠는가!) 병사가 손꼽아 기다리는 날은 아이러니하게도 직접 대면할 고작 몇 시간의 면회이다. 세상 어느 부모가 자녀와의 만남을 온라인이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는가. 성도의 모임이 온라인으로 대체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화 있을진저! 성령으로 한 몸 된 자매, 형제를 사랑하지 않음의 반증이다.
바울은 도망친 종, 오네시모를 위한 편지인 빌레몬에게 쓰며 “네가 순종할 것을 확신”한다. 심지어 “네가 내가 말한 것보다 더 행할 줄을” 안다.(몬 1:21).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직접 대면하고 싶어 숙소 마련을 부탁한다(몬 1:22). 소위 온라인으로도 자기 부하의 병이 나을 수 있을 것이라는 백부장의 믿음이 없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을 ‘보기를 간절히’ 원하며 ‘여러 번’ 대면을 시도하였다(롬 1장). 10명의 나병 환자들이 거리두기를 지켜 ‘멀리 서서’ 예수를 부른다(눅 17:12). 백부장의 부하를 고친 방식대로, 예수는 이번에도 거리두기로 진단만 하신 뒤 원거리 온라인으로 고치신다. 그들이 가다가 깨끗해짐을 받는다(눅 17:14). 그중 한 사람이 굳이 대면하여 감사를 표하자, 도리어 예수는 나머지 “아홉은 어디 있느냐?”(눅 17:17)며 찾으신다. 여기서 우리는 감사와 영광이 곧 ‘하나님을 대면하는 일’(Visio Dei)임을 깨닫는다.
비상시국이다. 마을에 홍수가 나서 체육관에 임시 숙소를 마련했다. 우리의 소망은 이 임시 숙소를 내 방처럼 안락하게 꾸미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어렵고 힘들어도 물난리 난 집으로 돌아가 그곳을 복구시키는 데 있다. 이처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된 사랑하는 자매, 형제를 대면하여 모이는 날을 꿈꾸어야 한다. 교회의 우선순위는 모임에 있고, 그 모임의 가장 좋은 형태는 비대면의 온라인 세상일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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