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2020년 3월 말, 중국에서 한국으로 귀국했다. 1월부터 3월까지는 이방인으로 외국에서, 4월부터 12월까지는 모국에서 ‘코로나 19’와 함께했다. 특히 처음 바이러스가 발생한 우한은 내가 몇 년 전에 거주했던 지역이다. ‘코로나 19’는 동떨어진 먼 얘기가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교회와 친구들이 직접 겪고 있는 삶이었고 나와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코로나 19'는 우리의 삶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건강의 위협, 고용불안정, 경제적 어려움, 실직 등.
한국으로 귀국했을 때, 우리 가정은 ‘실직’ 상태였다. 그동안 우리가 쌓아왔던 그 어떤 ‘스펙’도 일자리를 제공해 주지 못했다. “그러면 이제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깊이 고민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14일 동안의 자가격리를 끝내고, 제일 먼저 한 일은 ‘밥퍼 봉사’였다. “지금 돈을 받고 일할 곳은 없지만,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은 있지 않을까?”라는 고민과 기도의 결과였다. 하얀 비닐봉지에 주먹밥 두덩이, 삶은 계란 두 개, 음료수 한 개씩을 넣은 키트가 제공되었다. 주먹밥 한 덩이는 점심이고, 나머지는 저녁이었다. 정해진 시간까지 배식을 마치고, 몇 분이 더 줄 수 없느냐고 찾아오셨다. 드릴 게 없다는 말에 “이거 하나로는 모자라. 배고프단 말이야!”라고 외치던 분의 절규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이렇게 배고픈 사람이 많다니. 그것도 우리 가까이에!” 나는 그동안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셨던 은혜에 온전히 감사하지 못한 것을 회개했다. 그리고 “날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는 주기도문을 살아있는 기도로 드리기 시작했다.
실직의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나를 불러준 곳은 유명 물류센터, 소위 택배로 불리는 새벽 일자리였다. 물류센터를 중심으로 ‘코로나 19’ 확진자가 나오던 시기, 그 현장에 있었다. 일 시작 전, 휴게실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한 장면이 떠올랐다. 이른 아침, 제 삼시, 육시, 구시, 그리고 마지막 제 십일 시까지 일이 없어 서성이던 사람을 불러 일하게 하고 동일한 임금을 준 좋은 포도원 주인 이야기(마 20장). 인생의 비참한 순간에 나는 ‘천국’을 떠올렸고, 마지막에 들어간 품꾼 같은 사람을 일할 수 있도록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코로나 19’로 인해 물량이 늘어난 택배는 노동강도가 정말 높았다. 이렇게 힘들게 일하는데, 최저임금을 받는다는 건 너무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직접고용이 아닌 파견업이라는 고용 형태, 최저임금 문제, 택배로 보낼 수 있는 물건의 무게 제한 등과 관련된 물음이 생겼다. 법을 만드는 사람과 임금을 지불하는 사람이 이곳에서 단 하루만 일해 본다면, 이런 처우를 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안타까움도 들었다. 그 시기, 예수님께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러 오셨다는 말씀은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사 61:1).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 좋으신 하나님을 만나 나와 동일한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기회가 될 때마다 기도하며, 복음을 전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필요한 팬데믹 시기. 모이기에 힘쓰는 교회에 대한 세상의 관심은 여전히 높다. 대체로 부정적인 시선으로. 교회가 왜 이런 시선을 받게 되었을까? 언론의 기울어진 시선의 영향도 있겠지만, 우리 스스로도 얼마나 그리스도인의 향기가 나타나는지 돌아보아야 하는 때인 것 같다. 맛을 잃은 소금이 되어 세상에 밟히고 있는 것은 아닌지(마 5:13). 초대교회 때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사람은 “감히 그들의 모임에 끼어들지 못했다”(행 5: 13)고 한다. 로마시대 안토니우스 역병이 돌던 시기,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섬기듯, 아픈 이웃들을 섬기고 먹을 것을 공급해주는 등 선행을 베풀었다. 가족들도 병자를 내다 버리는 상황에서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구별된’ 삶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리스도인을 통해 세상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다르구나!”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고 감동을 받았다(롬 15: 2).
‘코로나 19’는 우리를 ‘정화’시키려는 하나님 계획의 일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시간을 통해서 우리 안에 거룩하지 못한 것들이 드러나고, 그것이 다시 하나님 뜻에 합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계획 말이다. ‘구별된’ 그리스도인. 이것은 초대교회 때의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었고,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전해진 초기에도 그러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이고,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시고, 각 사람은 지체가 되는 한 몸이다. 이것이 교회의 본질이고, 그리스도인의 존재 방식이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 3-6). 각자 있는 삶 속에서, 온전한 예배자가 되는 것(롬 12:1-2). 이것이 ‘코로나 19’ 시기에도 여전히 우리가 드려야 할 영적 예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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