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세상의 구원을 위해 불타는 어머니 교회
<로마서 8:37> (2017, 신연식 감독)
불편함
영화 <로마서 8:37>은 불편하다. 해당 성경 구절은 이렇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이 부분만으로는 결코 불편해 하지 않아도 된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길 수 있다는 약속을 받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구절을 타이틀로 한 영화는 보는 내내 불편하다. 어떤 영화든지 관객을 불편하게 하기 위해 제작되지는 않는다. 불편함도 영화의 기법이며 메시지이다. 그 불편함으로 무엇을 의도한 것일까?
소명과 욕망
안기섭 전도사(이현호 扮)는 부순 교회 간사로 일한다. 담임목사 강요섭(서동갑 扮)을 돕는다는 책임감이 소명으로 가득 차 있다. 전도사는 직분상 강 목사에 대해 절대 순종한다. 교회는 담임목사와 은퇴 목사 사이에 갈등으로 분쟁 중이어서 이상한 소문들이 교회를 어지럽게 했다. 그러던 중 강 목사에 대해 제보가 들어온다. 청년부 출신으로 이뤄진 간사들은 의혹을 품으면서도 사실 확인을 위해 진상 파악에 들어간다. 하지만 제보는 사실이었다. 강 목사가 그동안 저지른 죄악상이 드러난 것이다. 안 전도사는 혼란스러워진다. 목회자라는 신분으로 어떻게 육신의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여성도들에게 추악한 행동을 자행할 수 있단 말인가. 소명은 허울 좋은 명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었나.
속죄의 죽음
얼마 전 강 목사의 동생이 화상으로 숨진 사건이 있었다. 안 전도사는 울부짖으며 기도했다. 왜 말 못하는 장애를 가진 그가 죽어야 했는지. 인간의 죄가 사람을 얼마나 깊은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 있는지. 소명을 받은 목회자마저 타락시킬 수 있는지. 제보를 확인해 가면서 간사들은 진실을 알게 된다. 피해자들이 겪은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어떻게 치유하고 회복할 수 있는가. 이런 일이 교회 울타리에서 일어났었다니.
강 목사의 아내는 처절하게 몸서리치다 시동생을 찾아가 진상을 알린다. 그리고 아내는 장애인 시동생에게 “당신이 형을 위해 기도해 줄 마지막 사람이다”라며 말하곤 목숨을 끊는다.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목사인 형의 죄악을 알게 된 동생은 자신이 죗값을 치른다는 마음으로 움막을 짓고 기도한다. 면피해보려는 형을 대신하여 처절한 속죄의 기도를 한다. 움막이 불에 타오르는지도 모르고 기도에 빠져든다.
그리스도인들의 함정
강 목사의 성추문이 밝혀지자 노회가 징계위원회를 꾸렸다. 목사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직을 표명했으나 번복한다. 반대편의 은퇴 목사와 무언가 협약이 있었다. 강 목사는 교회 부설 센터 책임자로 다시 부임하는 수순을 밟는다. 안 전도사는 더 참을 수 없었다. 피해자들이 아직도 아파하고 있는데 어떻게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용서와 화해를 말할 수 있는가. 용서와 화해는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하는 행위여야 하는 것이 아닌가. 혹 받은 소명이라는 것은 자기 착각은 아닌가. 가해자들이 하나님이 내 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참람하다. 여기서 감독의 변을 들어보자. “하나님이 내 편이라고 생각해선 안된다. 내가 하나님의 편에 서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착각하기 쉬운 논리이다. 강 목사도 죄를 반성하고 인정했으니 이제 하나님이 내 편이라고 생각했다. 반면 철저하게 회개하고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게 젊은 간사들의 신앙 자세였다. 믿음은 형이상학적 논리로 이뤄져 있지 않다. 믿음은 예수님을 본받는 실제 삶이어야 한다. 은혜에 길들여지면 바리새인 신앙으로 굳어진다. 그래서 전도사는 죄와 연약함 때문에 처절하게 부르짖는다.
교회는 변함없는 어머니 품
부순 교회는 우리 시대의 여러 교회처럼 은퇴 목사와 위임 목사 사이에 갈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위임 목사인 강 목사의 은밀한 죄악 같은 범행 또한 우리 시대에 미디어가 고발하고는 했다. 피해자들은 교회를 떠나기도 했고, 죄인에 대한 치리는 뒷전으로 밀려나기도 했다. 현대판 교회 정치의 어두운 풍경이다. 분쟁으로, 목사의 성추행으로, 노회의 우유부단한 결정으로, 현대 기독교는 사회의 비판 앞에 서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 안 전도사와 청년들처럼 깨어있는 교인들이 많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에 희망을 갖는다. 영화는 말하기에 불편한 모습을 담는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교회의 회복이 시작된다고 믿는다. 불편함을 솔직히 끌어안는 행위는 회개와 회복의 출발이다.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 5:16)
예수께서 주인이신 교회는 영원하다. 세상은 환란과 풍파로 흔들릴지라도 교회는 변함없이 거기에 있다. 죄인이 모인 교회라 할지라도 거룩한 불에 죄를 태우고 거듭날 때 교회는 새로워진다. 교회는 죄인이나 의인이나 모두 자식처럼 품에 안고 젖 먹이며 양육하는 사랑의 어머니이다. 교회는 행복할 때나 어려울 때나 변함없이 성도들을 감싸 안는다. 그리하여 교회 안의 지체들을 십자가 사랑으로 넉넉히 이기게 한다. 지금은 세상에서 부족해 보일지라도 끝내는 불타는 사랑으로 이기게 한다. 이 산 소망이 교회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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