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 10:25-37)는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감동을 주었지만 미술가들에게도 깊은 울림을 주었다. 이 주제가 미술사에 등장한 것은 11세기경으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오토 3세(Otto III)의 복음서로 알려진 아름다운 수기(手記) 성경에 채색 삽화로 나타난다. 그림에선 피해자가 강도를 만나 구타와 찔림을 당하는 등 곤경을 겪는 순간을 위에서 아래로 차례대로 묘출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프랑스 북부의 생 베르텡(St. Bertin) 수도원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그림 성경에 등장한다. 그림은 무차별하게 공격을 받는 여행자, 주위를 지나가는 제사장과 레위인, 그리고 마지막으로 상처를 입은 사람을 말에 태워 여인숙으로 향하는 사마리아인을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차례대로 보여준다. 초기에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비유의 전체 이야기를 도해하는 방식을 취했다.
그 이후의 그림은 전체 이야기를 요약하는 종래의 방식과 달리 선한 사마리아인이나 부상당한 자에게 초점을 맞춘다. 요한 칼 로쓰(Johan Carl Loth)는 사마리아인의 선량한 행동에 주안점을 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상해를 입은 여행자를 발견하고는 즉시 자신의 말에서 내려 치료를 해주고 있다. 사마리아인은 성경의 기록대로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응급조치를 취하고 있으며 반면 여행자는 의식을 잃은 채 사경을 헤매고 있다. 로쓰는 사마리아인과 피해자를 화면 중심에 비중 있게 위치시킴으로써 사마리아인의 착한 행실을 강조하였다. 조지 와트(George F. Watts)는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눅 10:30) 여행자를 말에 태우기 직전의 모습을 화면에 옮겼다. 피해자는 혼미하여 자신의 몸을 가누지 못하자 사마리아인은 한쪽 다리로 피해자가 쓰러지지 않도록 부축하였다.
장 프랑수와 밀레(Jean François Millet, 1846년 작)의 작품은 사마리아인이 자신의 몸조차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축 늘어진 여행자를 도와주는 순간을 재현하였다.
이 작품은 신고전적인 인물화의 방식을 취하지 않으면서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박진감 넘치게 그려냈다. 밀레는 거장답게 의식을 잃은 여행자를 부축하며 가는 장면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여 감동을 전달한다.
막스 리버만(Max Liebermann, 1911년 작)의 작품은 그림의 배경을 우리의 일상 공간으로 바꾸어놓았다. 그림의 배경이 된 곳은 2천 년 전의 이스라엘이 아니라 독일의 한적한 농촌이며 성경에는 등장하지 않는 농부와 그 옆의 아내가 여행자를 구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농부는 밭일을 하다 강도의 공격을 받은 여행자를 발견하였고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간파하고 아내에게 급히 구조 요청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림의 초점을 제사장과 레위인에게 맞춘 화가들도 있다. 헴스께르크(Heemskerck)의 판화가 그런 경우인데, 여기에서는 여행자를 외면한 채 제사장과 레위인이 지나가고 있다.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피해자가 필사적으로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반면, 화려한 옷을 입은 제사장과 레위인은 각각 성경책과 율법판을 들고 어디론가 바삐 가고 있다.
그들은 피해자를 힐끗 쳐다볼 뿐 돌볼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얀 롬보트(Jan Rombouts), 구스타브 재거(Gustav Jaeger), 존 런시맨(John Runciman)도 이와 유사한 작품을 남겼는데, 이들은 공통적으로 절박한 처지에 놓인 사람을 방치하고 떠나는 인물들을 통해 종교적 열심이 실제로는 실천으로 옮겨지지 않고 있음을 고발하고 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사마리아인들이 예루살렘으로 여행하는 갈릴리 순례자들을 ‘상당히 많이’ 살해하였다고 기록했다.(Antiquities 20.118–136). 그렇다면 여행자가 도적을 만난 곳은 강도들이 우글거리는 위험천만한 장소였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당시의 유대인들은 ‘선한 사마리아인’이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겼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에서는 업신여김의 대상이 되었을 법한 사마리아인을 오히려 칭찬하셨다. 이에 유대인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긍휼에는 경계가 없다”는 말을 확인시키는 동시에 우리가 외면하고 혐오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우리의 이웃’이 될 수 있음을 알려준다. 만약 우리가 비유 속의 ‘사마리아인’이라면 누가 ‘우리의 이웃’인지 분별해내는 데 큰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이 그림들을 통해 예수님이 연약한 사람들을 하나님과의 교제 속으로 이끄셨듯이 우리도 재난의 시대에 지치고 소외된 사람들의 친구가 되도록 부르심 받은 자라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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