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최근 보건복지부 조사에 따르면 ‘코로나 19’ 감염자의 8.8%는 교회 때문이라 한다. 그런데 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시민들은 감염자 43.7%를 기독교 책임으로 돌린다. 좀 억울하지만 한국교회가 인심을 잃었음은 분명하다.
2세기 중반 로마에 전염병이 창궐했을 때, 19세기 말 우리나라에 콜레라가 확산되었을 때, 극소수였던 그리스도인들이 구제와 방역에 앞장서서 세상을 감동시켰다. 그런데 지금 한국 최대 종교로 부상한 기독교는 전염병 확산의 주범으로 몰려 이런 불신과 비난을 받고 있다. 왜? 흔히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은 좋은데 그대로 행동하지 않기 때문이라 한다. 그러나 대다수는 예배 등 교회 집회에 빠지지 않고, 새벽기도 등 기도에 열심이고, 기회만 있으면 전도하고, 성경 많이 읽고 공부하며, 헌금과 교회 봉사에 충실하다. 행동이 따르지 않는다고 비판할 수 있을까?
문제는 믿음을 행동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제대로 실천하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 율법사들이 소산의 십일조를 드리는 것에 대해서 그런 것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다. 안식일도 지키는 등 그들도 나름대로 믿음을 행동으로 옮겼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들이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을 버렸다”라고 하시면서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마 23:23)라고 심히 꾸짖으셨다. 이사야도 유다 백성들이 좋은 제물 많이 바치고 절기 잘 지키며 집회에도 열심이었지만 고아와 과부의 억울함은 무시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경고했다(사 1:10-17).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란 것을 매우 강조한 야고보도 헐벗고 굶는 형제에게 먹고 입으라고 말만 하고 실제로 먹을 것, 입을 것은 주지 않는 것을 예로 들었다(약 2:14-17). 성경이 일관되게 요구하는 믿음 실천은 의식적인 예배, 절기, 헌금 같은 것을 넘어서 정의, 자비, 신의와 같이 이웃 사랑에 충실한 것이다.
그런데 왜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 이사야 시대의 유다 백성들, 그리고 “믿음 좋은”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은 게을리하고 예배, 십일조, 집회 같은 의식적인 것에 더 열심을 낼까? 왜 어려운 사람들 돕는 것보다는 예배당 건축에 더 많이 헌금할까? 예배, 기도, 성경공부에 보이는 정도로 정의, 자비, 신의에 열심을 내었다면 지금처럼 사회의 지탄은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 그럴까?
자주 제시되는 이유는 정의, 자비, 신의 같은 것들은 불신자들, 인본주의자들도 다 강조하는 것이므로 구태여 기독교적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구원은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만 가능하지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므로, 윤리니 사랑이니 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공로를 중시하는 인본주의지, 은혜로 구원받는 기본 교리에 어긋나고 자유주의 신학을 따르는 것으로 본다. 실제로 자유주의 신학 동조자들 가운데 그렇게 주장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전혀 엉뚱한 핑계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윤리를 강조하는 것은 인본주의고 의식(儀式) 중심의 신앙생활은 신본주의로 보는 것은 논리적 착각에서 비롯된다. 윤리적으로 행동하고 이웃 사랑을 실천한다고 구원받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십자가 대속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반드시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하고 윤리적이라야 한다. 한국 사람이라 해서 모두 제주도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제주도 사람은 모두 한국 사람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고, 성경이 요구하는 믿음의 행함은 의식에 충실한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이익을 주는 사랑의 행위다.
흥미로운 것은 불교나 이슬람 같은 다른 종교들도 타락하면 의식 위주, 윤리 무시의 현상을 보인다는 것이다. 테러를 일삼는 무슬림도 예배에는 철저하고, 심히 부패한 미얀마 권력자들도 절을 짓고 부처에 금딱지 붙이는 것에는 열성적이다. 소위 ‘수직적인 관계’에 전력하고 ‘수평적인 관계’는 무시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받기 위하여 바친다”(Do ut des)는 기복신앙적 이기주의가 작용한다.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보다는 전능한 신에게 직접 바쳐야 확실하게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계산이 작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의 하나님은 다른 신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형식적인 준법보다는 우리에게 보이신 그의 사랑을 이웃에게, 특히 그가 사랑하시는 약한 이웃에게 베푸는 것을 더 기뻐하신다. 예배, 찬송, 기도, 전도도 물론 필요하다. 그러나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말씀을 따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다(삼상 15:22). 그런데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명령, 즉 율법을 지키는 것은 다름 아닌 이웃 사랑이다.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하신 한 마디 말씀에 다 들어있다(갈 5:14). 그리고 믿음에 입각해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마 25:40).
‘코로나 19’가 수많은 사람에게 가하고 있는 그 엄청난 불편, 고통, 절망을 고려하면 감염자를 조금이라도 줄이려고 안간힘을 다 쓰는 것이 지금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이요 믿음의 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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