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분부하신 것은 구약으로 말하면 거룩한 나라, 신약으로 말하면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는 것이다. 구약의 율법(토라)과 신약의 말씀은 다 이것을 향해 있다. 하지만 우리는 물어야 한다. 거룩한 나라, 하나님 나라가 과연 무엇이냐고. 하나님 나라를 구하려면 머릿속에 떠올려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데 무엇을 구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나는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서 나타나는 신앙과 삶의 괴리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를 묻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구하라”라는 말씀에 ‘고무’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구해야 할 나라가 명확하지 않으니 각자가 추구하는 것을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이라고 간주한다. 그것도 매우 열심히 말이다. 잘못된 열심과 확신이 만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오늘과 같은 끔찍한 재앙이 밀어닥친다.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도 신앙은 열심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의 모형을 ‘희년’이라고 말하고 있다. 안식일과 안식년을 포함하고 있는 희년이 구약이 말하는 거룩한 나라이고, 율법을 성취하러 오신 예수님도 자신의 사명을 희년 선포와 구현이라고 말씀하셨다(눅 4:18-19). 희년은 어떤 사회인가? 문자에 얽매이지 말고 희년의 의미가 무엇인지 묵상해보면 ‘관계의 회복’임을 알게 된다. 희년 선포를 대속죄일에 행했다는 것에서 우리는 희년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회복을, 희년에 부채를 탕감하고 노예를 해방하고 토지를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에서 희년이 인간과 인간의 관계 회복을, 그리고 희년에 경작을 쉬었다는 것에서 희년이 인간과 자연의 관계 회복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편 희년은 모든 사람에게 실질적 자유를 부여하는 것이기도 하다. 종에게 7일에 하루를 쉬게 한 것은 개인의 고유성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는 최소한의 긴급조치다. 7년에 1번씩 부채를 탕감하고 종을 해방하는 것 또한 수직적 관계를 수평적 관계로 바꾸기 위한 획기적인 조치다. 주인과 종의 관계,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는 종속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7년이 일곱 번 지난 다음 해인 희년이 되면 어쩔 수 없어서 팔아버린 토지를 되돌려 받는 것은, 지주에게 경제적·정신적으로 예속된 소작인에게 실질적 자유를 부여하고 종속적 관계를 완전히 청산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를 희년으로 이해하고 나면 우리가 구해야 할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알게 되고 우리 사회 전체를 통찰할 수 있게 되며, 하나님 나라를 보여줘야 할 교회의 현주소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게 된다. 그랬을 때 그리스도인 안에서 분업과 협업이 자연스럽게 일어나게 된다.
나는 희년에서 토지에 관한 가르침을 강조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토지가 없으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동차가 없으면 불편하지만 토지가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하다. 이런 까닭에 성경은 토지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특히 강조한다. 신분과 부채에서 해방되어도 토지가 없으면 자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토지를 소수가 독차지하고 있고, 40%에 가까운 세대는 한 평의 땅도 소유하지 못하고 있으며, 소수가 토지에서 발생하는 엄청난 불로소득을 누리고 있다. 이로 인해서 수많은 갈등이 유발되고 있고, 불평등도 심해지고 있다. 성경의 정신에서 멀어진 토지제도가 부동산 투기를 낳고 그것이 불평등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부동산으로 소득을 누리는 부동산 투기라는 경제행위에 대해서 고민하게 된다. 내가 하는 부동산 투기가 생산적 경제행위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행위인지를. 그런데 부동산을 아무리 열심히 알아보러 다녀도 GDP는 1도 증가하지 않는다. 게다가 그렇게 해서 돈 버는 행위는 집이 없고 땅이 없는 사람을 더 고통스럽게 한다. 생산에 기여하고 번 돈이 아니므로 본질상 도둑질이고 다른 사람은 그만큼 손해를 본다.
물론 지금과 같은 제도하에서 부동산 투기를 하지 않으면 손해를 본다. 그러나 우리는 이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요한계시록 2장에서 요한은 그리스도인에게 니골라당을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니골라당은 당시 황제숭배는 정치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신앙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다. 황제숭배에 참여해야 도장도 받고 그래야 상거래도 하면서 먹고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한은 그것을 금했다. 경제적으로 손해인데도 말이다. 부동산 투기에 대해 그리스도인이 취해야 하는 태도도 바로 이와 같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면 우리는 그냥 손해를 보면서 견뎌야 하나? 아니다. 희년의 제도화에 힘써야 한다. 부동산 투기가 불필요한 정의로운 경제 제도를 수립해야 한다. 이웃을 괴롭히는 부동산 투기를 하지 않는 것을 넘어서, 무주택자를 고통스럽게 하고 불평등을 심화시켜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파괴하는 부동산 투기를 근절하는 제도, 희년의 정신을 담은 제도를 구현하는 데 동참해야 한다. 희년을 묵상하면 하나님 나라가 선명해진다. 기준이 확고해지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준과 푯대가 명확해진다. 파편화된 현실의 조각들을 하나의 전체적 문맥 속에서, 총체성 속에서 배치할 수 있게 되고 삶과 신앙의 괴리는 점점 줄어들게 된다.
이용약관 | 개인정보 취급방침 | 공익위반제보(국민권익위)| 저작권 정보 | 이메일 주소 무단수집 거부 | 관리자 로그인
© 2009-2024 (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고유번호 201-82-31233]
서울시 강남구 광평로56길 8-13, 수서타워 910호 (수서동)
(06367)
Tel. 02-754-8004
Fax. 0303-0272-4967
Email. info@worldview.or.kr
기독교학문연구회
Tel. 02-3272-4967
Email. gihakyun@daum.net (학회),
faithscholar@naver.com (신앙과 학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