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사건이 왜, 어떻게 일어났는지 마주하기 어려웠다. 자세한 내용은 찾아볼 용기도 없었다. 바이러스의 횡포 아래 보낸 한해의 막바지를, 우리는 소식을 접하고 그렇게 충격 속에서 보냈다. 500일 남짓 되는 이 땅에서의 삶을 뒤로 한 채, 정인이는 그렇게 떠났다. 입양 가족을 소개하는 EBS 다큐멘터리, 거기서 보였던 정인이 입양 부모의 웃음을 떠올리니 손이 떨린다. 글을 쓰는 지금도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다. 작디작은 아이였다. 그래서 응당 부모의 뜨거운 사랑과 부드러운 보살핌이 필요했다. 하지만 정인이에게는 입양 부모의 차가운 방임과 무자비한 폭행만이 존재했다. 입양 전 짧은 기간, 위탁 가정의 따스함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입양 부모에게 분노하며 정인이를 애도했다. 여기저기에서 ‘입양’에 대한 성토의 목소리가 나왔다. 어떤 사람들은 입양을 할 수 있는 자격과 기준을 높여야 한다고, 어떤 이들은 생부, 생모의 책임을 말하며 입양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기도 했다. 또 정인이와 같이 신생아 입양이 아닌 사례에 대한 특수성에 집중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급기야 정부까지 나서서 입양가정에 대한 추가 조사와 파양(罷養)을 언급했다. 이 일은 기독교에서 더 충격이 컷다. 정인이의 입양 부모 모두 그리스도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부모는 모두 기독교인이었으며 그들이 공부한 학교 또한 기독교 대학이었다. 나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절망했으며, 기독교 학교의 교육자로서 무기력을 느꼈고, 나아가 입양 부모의 한 사람으로서 분노했다.
‘코로나 19’ 시대, 방역지침을 어긴 것으로 끊임없이 지탄을 받고 있었던 기독교였다. 하지만 정인이 사건으로 인해 기독교는 시민윤리를 넘어 인간윤리의 기준으로 비판을 받고 있다. 기독교 신앙은 어디로 갔는가?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정인이 사건을 ‘입양’이라는 특수한 관점으로 보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도 필요하다. 다만, 이를 ‘입양’의 관점에서만 보게 되면 근본을 놓치게 된다. 중요한 건 ‘부모됨’이다. 너무나 대책 없는 말처럼 들리겠지만, 나는 이 문제의 대책을 기독교 신앙에서 찾으려 한다. 절망한 그리스도인과 힘이 빠진 기독교 교육자, 분노하는 입양 부모의 마음을 안고.
첫째, ‘부모 됨’은 기쁨이다. 기독교 신앙은 ‘양자 됨’을 통해 멸망받아 마땅했던 우리를 양자 삼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 우리는 모두 양자다! 그렇기 때문에 입양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근거다. 여기서 좀 더 나가보자. 자녀 된 ‘우리’에게 집중하다 보면 입양하신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잊는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내가 법정에서 둘째의 입양 확정판결을 받는 그 순간에 깨달았다. 셋째의 입양 확정 판결문을 받았을 때 더욱 확신했다. 자녀를 삼는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기쁨이다! 지나가는 누구에게나 말하고 싶었다. 이 아이가 이제 나의 아이라고. 이제 누가 뭐라고 해도 법적으로 나의 자녀라고 말이다. 유한한 나조차 이렇게 기쁜데 무한하신 하나님께서는 어떠하셨겠는가.
둘째, 교회가 부모다. 나의 경우, 올바른 아버지상을 갖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하지만 고등학생 시절, 나를 보살펴 주시던 목사님의 모습을 보며 나 또한 어떤 어른이 되어야 할까 고민했다. 사실 교회가 부모라는 건 교회의 본질이다. 그리스도인의 자녀는 유아세례를 통해 ‘교회의 자녀’가 된다. 유아세례는 단순히 부모가 자녀를 기독교의 신앙고백으로 양육하겠다고 약속하는 자리를 넘어 교회 전체가 약속하는 자리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교회는 본질적으로 개인일 수 없다. 이런 이유로 비엘레(André Biéler)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공동체 밖에서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양육도 마찬가지다. 자녀 양육보다 힘든 일이 있을까. 부모들은 양육을 통해 실패와 좌절, 자괴감을 안는다. 그래서 교회는 ‘독박 육아’를 그대로 두면 안된다. 함께 교육하기로 약속했다면 교회가 함께 자녀 양육을 책임져야 한다. 이를 통해 부모는 휴식할 수 있고, 자녀는 충분한 돌봄을 받는다. 또한 부모는 다른 부모들의 양육방식을 보고 배울 수도 있다. 만약 집에서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아이라면, 교회의 다른 어른들을 만나고 경험하며 그들을 통해 긍정적인 부모상을 키워갈 수도 있다.
셋째, 다음 세대에게 ‘부모 됨’을 위한 교육이 필요하다. 나는 기독교 학교의 교사로서 학교 교육에 관심이 많다. 특히 진로교육이 그렇다. 진로(進路), 말 그대로 학생들이 앞으로 나아갈 길, 삶을 위한 교육이다. 이렇게 보면 학교의 교육과정 전체는 진로를 중심으로 구조화되어야 한다. 하지만 일반적인 학교의 ‘진로교육’은 파악한 학생의 성향과 능력을 통해 나중에 갖게 될 ‘직업’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과연 사람의 삶이 직업을 준비하는 것으로 충분할까. 수많은 청년들은 취업을 위해 거의 모든 시간을 바친다. 취업 후 돈을 벌면 결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물론 결혼은 할 수 있다. 하지만 부모가 되긴 어렵다. 그래서 교회, 특별히 기독교 학교의 진로교육에는 남편과 아내, ‘부모 됨’의 교육과정이 필요하다. 이것이 진정 진로교육이 아닐까. ‘부모 됨’의 교육과정이 존재한다는 건 공동체 안에서 그 가치를 인정한다는 뜻이며 이는 명시적 교육과정 뿐 아니라 분위기 즉, 잠재적 교육과정이 된다.
우리 가정의 첫째는 배 아파 낳은 자녀이며, 둘째와 셋째는 입양을 했다. 세 자녀는 모두 나와 아내의 ‘친자녀들’이다.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건 나의 아집이 아닌, 기독교가 말하는 ‘부모 됨’과 ‘자녀 됨’ 때문이고, 함께 웃고 아파할 수 있는 교회와 입양가정 모임 때문이다. 그래서 말하고 싶다. “교회여, ‘부모 됨’을 기억하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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