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신앙과 괴리된 삶의 회복 :
청파감리교회 김기석 담임목사
인터뷰어 : 오민용 (서울대 법학연구소 선임연구원, 기독교학문연구회 총무)
일시 & 장소 : 2021년 2월 25일(목), PM. 1:30. 청파감리교회
사진 & 정리 : 석종준 (서울대 캠퍼스 선교사)
오민용 : 목사님, 한국교회는 현재 ‘코로나 19’ 상황에서 여러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지역교회 담임 목회자로서 이 시대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고 계시는지요.
김기석 : 우선 우리가 든든하다고 생각했던 우리가 서 있는 문명의 토대라는 것이 정말 얼마나 허약한가를 느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계시적 사건일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도 드는데요. 어떤 이는 하나님이 인간을 벌주기 위해 이런 병을 내렸다고도 얘기하지만, 저는 그렇게 보기보다 인간의 과도한 경제활동이 만들어 낸 생태 위기와 맞닿아있다고 보고 싶어요. 사람들은 그동안 대부분 경제에 가속페달을 밟기 위해서 이 생태 위기의 문제에 주목하지 않았는데, ‘코로나 19’가 갑자기 ‘멈춤’ 신호처럼 다가와 우리를 돌아보게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지향해 왔던 삶의 방향이나 삶의 방식들에 근본적 문제가 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질문 앞에 우리를 세웠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는 ‘코로나 19’를 향한 질문보다는 오히려 그것이 우리를 향해 던지는 질문에 어떻게 응답하느냐 하는 것이 더 절실한 과제라는 생각이 들고요. 그렇게 본다면 이것은 문명사적 전환의 하나의 계기일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인간 중심적 경제우선주의, 문화적 지향 같은 것들이 근본적으로 재고되어야 하는 시기임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죠.
오민용 : 이 팬데믹 상황은 기독교에 예배를 둘러싼 논의와 도전에 직면시켰고, 그 와중에 당국의 대면 예배 금지 또는 제약 방침을 종교 탄압의 의미로 해석하고 우려하거나 심지어 거부하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관련해서 어떤 말씀을 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김기석 : 원칙적으로 예배는 함께 모여서 드리는 대면 예배가 본질에 더 맞는다고 얘기할 수는 있지만, 지금 같은 비상 상황에서는 비대면 상황 속에서조차 우리가 예배자로서 어떻게 어디서든 설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는 것도 맞다는 생각을 하지요. 내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높이 받들기 위한 것이 예배의 핵심이라고 한다면, 지금 이 시대에 하나님이 우리의 어떤 예배를 받고 싶어 하실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함께 무작정 모여서 감염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이 정말 좋아만 하시리라고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비대면 예배를 지속하고 있는 다수 교회들은 믿음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라, 오히려 행여라도 교회가 감염의 매개가 되어서 많은 사람들을 불안하고 불편하게 만들까 하는 생각에서 그렇다면, 개인적으로는 그것이 훨씬 더 예배자의 마음으로는 적절한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마치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하고 포로로 잡혀가서 성전이 사라졌을 때, 그들이 비로소 했던 것이 마음의 예배 처소를 짓는 일이었거든요. 그래서 내면에 성전을 짓고, 그 마음속의 중심을 따라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졌던 거죠. 다니엘이 예루살렘을 향해 난 창가에 엎드려 하루 세 번씩 기도를 올렸던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코로나 19’가 극복되면 대면 예배를 중심에 두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지금 이런 상황 속에서 더 본질적인 예배는 오히려 사람들을 위험에 빠트리지 않는 예배이며, 이를 위해 스스로 절제할 수도 있는 것이 더 아름다운 예배자의 자세일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오민용 : 한국 기독교는 초기에 비하면, 현재 교인 숫자나 부동산, 구성원의 사회적 지위 등이 비할 수 없이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 속에서의 선한 영향력은 오히려 크게 약화되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요?
김기석 : 그 까닭은 한국 교회가 대단히 많은 특권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는데요. 처음으로 기독교가 전래되었을 때만 하더라도 낮은 자리 백성들의 자리에 서서 그들의 아픔을 함께하고 또 방향을 제시하는 모습이었지요. 그러나 이제는 외적으로 성장했고 지켜야 할 것들이 많아졌는데, 이것은 이미 교회가 권력화되기 시작했다는 얘기지요. 그런데 ‘신앙생활’이라고 이야기할 때 ‘신앙’은 내가 고백하는 내용, 명사형이죠. 그런데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명사를 동사화하는 과정이에요. 다시 말해서 저는 각자가 고백하는 것을 삶으로 번역하는 과정이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그저 고백하고 끝나요. 그러나 이 말씀은 예수를 길로 삼는 사람들이 예수가 걸었던 길을 걸어야 하는 것이지요. 한 마디로 이는 십자가의 길이며, 나를 희생하여 다른 사람들을 살리는 삶, 결국은 성육신의 진리를 얘기하는 것이지요. 한 걸음 더 나아가 세상에는 ‘명사적 무신론자’도 있지만, ‘실천적 무신론자’가 더 많은 법이고, 본인은 잘 믿는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실천적 무신론자’가 너무 많아요. 안타깝지만 그런 생각이 듭니다.
오민용 : 얼마 전 한국 사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충격을 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른바 입양아 ‘정인이 사건’인데요. 놀랍게도 그 사건이 일어난 곳은 부부가 ‘정통 교회’에서 줄곧 성장한 그리스도인 가정이었습니다. 사실 성경 전체는 생명 존중의 사상으로 가득 차 있지 않습니까? ‘정통 교회’라면 마땅히 그 말씀을 전하고 배웠을 텐데요.
김기석 : 아주 심각한 문제입니다. 개신교회에 가장 부족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신앙을 삶에서 훈련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끊임없이 성찰하는 것입니다. 이 성찰에는 자기 속에 있는 욕망도 객관화하여 바라볼 수 있는 내적 능력 같은 것이 있는데, 이는 오늘의 한국교회에 너무나 부족한 신앙의 측면이라는 생각이 들지요. 사실상 내 속에 항상 가지고 있는 욕망의 구조를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덕성으로 극복해 가는 부단한 과정도 필요합니다. 정인이 사건도 생각해 보면, 그 사람들이 유난히 나쁜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 신앙의 구조 속에서 태어난 괴물이라는 것이지요. 그 태도들이 두 얼굴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누구든 가면을 쓰고 살지요. 어떤 가면이냐가 문제이지만, 저만 해도 목사란 가면을 쓰고 삽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노릇이 오래되다 보면 가면이 자기 얼굴이 될 수 있어요. 변하는 거죠.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내가 쓰고 있는 가면에 걸맞은 삶의 내용이 뭘까에 대해 끝임없이 고민을 계속해야 합니다. 그런데 가슴 아프게도, 현재 한국교회 신앙 교육은 너무나 이중적 자아를 만들어 내도록 구조화된 측면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오민용 : 목사님, ‘신앙과 괴리된 삶의 문제’는 그리스도인 지성인도 예외는 아닌 것 같습니다. 신앙의 영역과 학문의 영역의 이원화라는 유혹에 희생양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이 유혹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김기석 : 신앙인은 결국 순례자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사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기독교 지성인이라고 했지만, 그냥 목회자로 얘기해도 그렇지요. 목회자에게는 두 가지 정체성이 있어요. 하나는 구도자(순례자)로서의 정체성이고, 또 하나는 지역 교회 목회자로서의 정체성이지요. 그런데 너무나 많은 목회자들이 목회자라는 정체성 속에 구도자라는 정체성이 삼켜지도록 내 버려두지요. 더 이상 순례자로 살지 않는 거예요. 그냥 그 교회에서 합리적인 리더로서 특히 교회를 부흥시키고 발전시키고, 그리고 그 결실이 얻어졌을 때, 마치 능력 있는 것처럼 으스대지요. 그러나 목회자들이 가져야 될 것은 구도자로서의 정체성이지요. 이 정체성을 지성인들이 잘 붙잡는다면, 저는 ‘지성인’이라는 정체성과 ‘삶을 살아내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절대로 분열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오민용 : 목사님께서는 얼마 전 CBS의 <잘잘법 : 잘 믿고 잘사는 법> 프로그램을 통해서 삶을 기타의 조율에 비유하시면서, “나의 욕망을 ‘기준음’으로 삼지 말고, 하나님의 마음을 ‘기준음’으로 삼는 삶”이 필요하다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김기석 : 에덴 이후에 인간을 사로잡고 있는 기본 정서는 불안입니다. 그런데, 불안하다는 것은 자기 외부에 있는 타자들이 적대적일 거라는 생각이 있는 거고, 더 근원적으로는 죽음이 우리에게 던지는 경고장 같은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불안을 이겨내기 위해서 우리는 뭔가 꼭 붙들 것들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 때문에, 나를 에워쌀 수 있는 울타리를 만들어야 하고 장벽을 더 크게 만들어야 하는데, 이렇게 되니까 자기가 우주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자기가 우주의 중심이 되는 순간 타자는 내게서 점점 멀어지기 시작하고, 타자의 고통이 내게 들려오지 않는 겁니다. 신앙의 보람이란 건 자기중심적인 삶에 붙들려 있던 사람들이 자기중심주의라는 감옥에서 벗어나 타자의 세계에 눈뜨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그 보람은 내 욕망이 아니라 더 큰 세계인 하나님의 마음이죠.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큰 세계 앞에 나를 개방하면서, 시냇물이 흐르다가 강으로 합류하고 바다로 합류하는 것처럼, 작은 나를 넘어서서 더 큰 세계 속에 합류해가는 것이 신앙생활의 과정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결국 하나님의 마음에 내 마음을 조율하는 것이 바른 신앙생활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민용 : 목사님의 잘 알려진 저서 <청년 편지>(성서유니온, 2019)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목사님은 이 땅의 청년 세대의 마음을 잘 헤아려 주시고, 공감해 주시는 분으로도 유명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 청년들이 ‘신앙과 괴리된 삶’을 극복하는 사람이 되려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김기석 : 참 난감한 시대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청년 세대야말로 자기 부모 세대에 비해서 더 어려운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세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시대 청년들이 느끼는 상실감과 박탈감이란 것을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시대이죠. 그런데, 누군가가 “인간답고 품위 있게 살려면 이 정도는 누리고 살아야 해”라고 말할 때, 거기에 동의하는 순간 불행해진다고 하지요. 이 정도는 누리고 살아야 교양 있고 인간적인 삶이라고 하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는 “난 그거 없어 그래도 괜찮아”라고 말할 수 있을 때 더 자유로워집니다. 루쉰의 <아큐정전>에 나온 정신승리법을 이런 것이라고 얘기하는지 모르지만, 저는 이 정신승리법을 부정적으로만 보지 말라고 하고 싶어요.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오시는 이야기가 있는데, 하나님이 후손에 대한 약속, 땅에 대한 약속을 주시면서 그냥 장막 안에서 네 후손이 많아지게 할거라고 한 게 아니라, 데리고 나가서 하늘을 보게 하지요. 시선을 높은 데 두고 이런 데 내가 너무 연연하기에는 내 삶이 소중하다는 자긍심을 가지고서 조금은 더 당당하게 “난 괜찮아.”라고 해야 겠지요. 이런 마음이 청년의 때에 조금은 더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오민용 : 마지막으로 ‘코로나 19’라는 ‘뉴노멀 시대’의 도전과 점증해 가는 ‘기독교의 게토화’라는 이중고를 현재 힘겹게 감당하고 있는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 청년들에게 응원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김기석 : 시리아 작가 자카리아 타메르의 <열 번째 날의 호랑이>라고 하는 짧은 이야기가 의미심장해요. 어느 날 산에서 호랑이 한 마리가 포수에게 잡혀 와요. 쇠창살에 갇힙니다. 호랑이는 숲의 기억을 잊어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에 쇠창살을 이로 뜯으면서 날 놓아달라고 얘기하는데, 포수는 빙그레 웃으면서 “결국은 내 말을 듣게 될 거야. 왜냐하면 나한테 먹을 게 있거든”이라고 말해요. 며칠이 지났어요. 호랑이가 “먹을 걸 줘”라고 하자, 포수는 “고양이처럼 야옹 하고 울면 먹을 걸 주지”라고 해요. 호랑이는 “내가 호랑이인데 어떻게 고양이처럼 울어”라고 하면서 거절해요. 그러고 또 며칠이 지났는데, 이레째 되는 날 호랑이가 “먹을 걸 줘”라고 하니까, 포수는 고양이처럼 울라고 합니다. 그러자 “야옹야옹” 했는데, 먹을 걸 또 안 줍니다. 그러면서 포수는 당나귀처럼 “히힝” 하고 울어보라고 합니다. 그러자 호랑이는 그것은 차마 할 수가 없다고 거절하다가, 배가 고픈 나머지 당나귀처럼 “히힝히힝” 하고 우는데, 그러자 포수가 살코기가 아닌 건초더미를 던져줘요. 그는 더 이상 호랑이가 아니라 당나귀였기 때문입니다. 이게 길들여진다고 하는 것이죠, 먹을 것을 가진 자들이 우리를 길들이려고 하는 걸 기가 막히게 보여주는데, 그리스도인 청년들이 적어도 나는 세상에 의해 길들여지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으면 합니다. 그건 어떨 때 가능하냐면 작은 것을 충분히 누릴 줄 아는 내면의 능력이 생겨날 때이죠.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먹을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길들여지죠. 힘겨운 건 사실입니다, 힘겹지만, 그래도 자기가 호랑이라는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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