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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엘륄, 시대를 앞서간 사상가
<자크 엘륄, 시대를 앞서간 사상가> / 이상민 / 고북이 / 2020
이 책의 저자 이상민 박사는 국내에서 탁월한 자크 엘륄(Jacques Ellul, 1912-94) 전문가 중 한 명이다. 불문학교육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다수의 엘륄 저서를 번역한 저자는 엘륄의 저서들을 원어로 읽고 번역하고 연구함으로써, 국내에서 엘륄에 대해 가장 정통한 이해와 정보를 습득한 일급 연구자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엘륄의 주요 저서들과 엘륄 연구자들 혹은 엘륄 지지자들의 연구서들을 광범위하게 인용하면서, 엘륄의 사상과 활동, 영향과 논쟁을 체계적으로 정리·소개한다. 엘륄의 저서들이 국내에 상당수 번역되면서 엘륄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꾸준히 향상되어 왔지만, 엘륄에 대한 총체적 이해를 위한 연구서가 부족한 현실에서, 이 책의 출판은 엘륄의 ‘열혈 광팬’ 뿐 아니라, 한국 사회와 교회를 위해서도 매우 반갑고 고마운 선물임이 분명하다.
이 책은 총 5부로 구성되었으며, 엘륄에 대한 유익한 정보를 포함한 부록이 추가되어 있다. 제1부는 그리스도인이자 사회활동가로서 엘륄의 생애, 그리고 신학과 사회학을 축으로 한 그의 사상을 간단명료하게 소개한다. 제2부는 엘륄에게 가장 큰 명성과 비난을 동시에 안겨준 ‘기술’(technology)에 대한 그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다루고, 제3부는 바르트와 키르케고르의 영향 속에 형성·발전된 엘륄의 신학 사상의 여러 주제들을 분석적으로 소개한다. 이어서 제4부는 엘륄의 신앙과 사상이 결합되어 구체적인 실천으로 표현된 프랑스 인격주의운동의 역사와 엘륄의 관계를 다룬 후, 기존의 혁명과 구별되는 ‘혁명적 기독교’에 대한 엘륄의 생각도 검토한다. 끝으로, 제5부는 엘륄의 사상이 프랑스와 미국에서 어떻게 평가되고 영향을 끼쳤는지를 추적하면서, 현대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다양한 난제들에 대한 엘륄 사상의 적용 가능성을 모색한다.
그렇다면, 이 책의 주된 강조점은 무엇일까? 먼저, 이 책은 엘륄 사상의 두 축인 신학과 사회학에 관심을 집중한다. 즉, 엘륄이 마르크스에 대한 비판적 연구를 통해 기술의 통제 하에 놓인 서구 사회를 구체적으로 이해·분석할 과학적 도구를 확보했지만, 사회학의 근본적인 한계를 절실히 인지하면서 궁극적인 해법으로서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에게 도움을 청했다는 것이다. 다음의 인용문은 이런 엘륄 사상의 이중적 구조를 제시하는 결정적인 열쇠다.
만일 당신이 신학적 영역만을 고려한다면, 구체적인 요소가 당신에게 부족할 것이다. 만일 당신이 사회정치적 영역에만 단지 관심이 있다면, 당신은 대답과 출구가 없는 상황에 끊임없이 부딪힐 것이다.(54)
둘째, 이 책은 기술과 현대사회 간의 비극적인 관계를 선구적으로 주목했던 엘륄의 역사적·현재적 가치를 독자들에게 설득력 있게 소개한다. 20세기 동안 인류는 전대미문의 과학기술의 발전을 경험했고, 그 발전은 세계화와 연결되어 전 지구적 현상이 되었다. 정치와 경제, 심지어 종교마저 이런 기술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진단하면서, 엘륄은 성경과 신학에 근거한 신학적·윤리적 해법을 제시했다. 한동안 그의 이런 주장은 철저히 무시되었지만, 21세기에 그의 예언자적 메시지가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재조명되고, 그에게 영향받은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저항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따라서 세계에서 신자유주의와 4차 혁명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적응하는 한국에서 엘륄을 읽어야 할 이유도 자명해진다.
셋째, 엘륄의 신학 사상에 대한 본서의 분석적 소개와 평가도 주목할 가치가 있다. 물론, 전통 교리에 익숙한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섭리적 개입을 부정하고 보편구원론을 지지하는 듯한 엘륄의 주장은 순간적으로 거부 반응을 일으킬 수도 있다. 하지만 기도, 자유, 소망, 성서, 계시 등에 대한 엘륄의 깊은 사색과 현대 신학에 대한 비판적 성찰은 신학자로서 그의 탁월함을 입증할 뿐 아니라, 현대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소중한 영적·신학적 선물이다. 이 책은 엘륄의 이런 신학적 특징과 가치를 독자들이 명확히 이해할 수 있도록 친절하게 안내한다.
반면,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몇 가지 아쉬운 점도 있다. 먼저, 이 책에서 엘륄의 다양한 주장들에 대한 저자 이상민 박사의 개인적 평가나 분석은 거의 들을 수 없다. 물론, 이 책을 구성하고 엘륄의 글을 인용하며 학자들의 글을 소개하는 과정 자체가 저자의 통찰과 연구의 산물이지만, 수많은 주제에 대한 엘륄과 그의 비평가들의 주장에 대한 저자 자신의 평가와 개인적 견해를 보다 적극적으로 표현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둘째, 이 책이 엘륄의 사상과 한국 사회·교회 간의 상관관계, 혹은 적용 가능성을 보다 적극적으로 다루지 않은 것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물론, 책 전반에서 독자들은 엘륄의 생각을 접하면서 자동적으로 그의 생각과 한국 사회·교회 간의 상관관계 혹은 적용 가능성을 모색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저자가 이 문제를 보다 직접적·적극적으로 다루었다면 책에 대한 독자들의 흥미와 관심이 보다 고양되지 않았을까? 셋째, 이 책에는 한국 사회와 교회에서 엘륄 연구와 영향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한국에 엘륄이 소개되기 시작한 지 한 세대가 지났고, 다수의 엘륄 저서들이 번역되었으며, 적지 않은 논문과 연구서도 출판되었다. 이런 한국의 상황에 대한 소개와 분석이 이 책에 포함되었다면 정보적 차원에서 더 풍성해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신자본주의의 광풍으로 인간의 가치마저 상품화되는 비극적인 현실에서, 또한 자본주의 속에 연착륙한 한국 교회가 맘몬의 지배하에 굴종하는 것 같은 서글픈 상황에서, 자크 엘륄의 생애와 사상 자체가 우리에게 소중한 통찰과 묵직한 죽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저항하는 것이다”라는 엘륄의 말이 마음에서 깊이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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