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2016년 3월, 5,000년의 바둑 역사를 가진 인류는 인공지능(AI) ‘알파고’에게 패했다. 그런데 그 ‘알파고’는 6개월 뒤 창고로 들어간다. 새로 만들어진 ‘알파고 제로’가 바둑 독학 30일 만에 ‘알파고’를 이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불과 몇 개월 만에 ‘알파고 제로’도 창고 신세를 지게 된다. 새로 만들어진 ‘알파 제로’가 바둑 독학 3시간 만에 ‘알파고 제로’를 이겼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류의 발전 속도는 지금까지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빠르다. 이 와중에 ‘코로나19’ 사태라는 기름이 부어지고, 불과 1년 만에 우리 삶의 표준(normal)은 크게 변해버렸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 역시, 같은 세상을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어떻게 거룩하게 살 수 있는가에 대한 신앙의 표준도 큰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기존 그리스도인의 표준은 어땠을까? 나는 대학생 때 CCC(한국대학교선교회)에서 가천대 대표 순장을, 교회에서는 청년부 회장과 초등부 교사로 봉사했었다. 그 당시 나의 일상은 예배와 교회 공동체 모임의 연속이었는데, 이는 대학생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나의 신앙 표준이었다. 주일에는 초등부 교사와 청년부 회장, 화요일에는 CCC 캠퍼스 모임 섬김, 수요일에는 교회 수요예배와 청년부 리더 모임 참석, 목요일에는 CCC 지부 채플, 금요일에는 섬기는 교회 금요예배, 토요일에는 청년부 토요기도회에 참여했었다. 이렇게 당시 나의 신앙을 검증하는 표준은 교회와 선교단체의 시스템 안에 있는 예배와 봉사였다. 많은 사람의 칭찬과 인정을 듬북 받으며 신앙생활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나는 과연 정말 그럴 만한 자격이 있던 것일까?
작년부터 ‘코로나 19’로 인해, 모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지고, 비대면 예배가 시작되면서 내 신앙의 수준의 실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온라인 예배를 드리게 된 지 불과 2주 만에, 나는 예배 시간이 다 되도록 늦잠을 잤고 속옷 바람으로 침대에 몸을 기대어 예배를 드렸다. 군 복무 시절 예배가 없던 곳에서 예배를 세울 만큼 스스로 신앙을 자부했던 나였는데,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홀로 감당하는 내 신앙 수준의 실체는 처참했다. 다만, 그 와중에 위안이 된 것은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코로나 19’를 통해 교회 시스템에 잘 포장된 듯한, 마치 회칠한 무덤과 같은 우리 신앙의 민낯을 드러내신 것은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우리를 이렇게 모이지 못하게 하심으로 신앙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셨을까? 도대체 무엇을 회복시키고 싶으셨을까?
나는 ‘예배의 회복’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예배란 단지 교회의 ‘공적 예배’가 아니라, ‘삶의 예배’를 말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 전체로서의 ‘예배’를 회복시키고 싶으셨던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나는 이 생각의 성경적 근거를 사도행전에서 찾았다.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사도행전 8:1).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사도행전 8:4). 하나님께서는 교회 공동체를 흩어지게 하셨다. 믿는 자들이 늘어가고, 공동체가 성장하는 초대교회에서였다. 하나님은 심지어 스데반 집사께서 순교하는 큰 박해를 통해서 교회들이 흩어지게 하셨다. 그런데 그 흩어진 성도들이 온 천하를 두루 다니며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였다.
그렇다면 ‘삶으로서의 예배가 회복되는 것’과 ‘예수님이 전해지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 그때 우리는 어떤 상황이었는가? 무엇을 하는 중이었는가?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대부분 ‘예배드리던 중’이었을 것이다. 예배에는 하나님께서 임하신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예배에 참여한 이들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는 것이다. 뉴노멀 시대 역시 달라질 것은 없다고 본다. 그렇게 우리 삶의 예배가 회복된다면, 학교, 직장, 동호회, 가족 등 우리가 있는 모든 곳은 하나님께서 임하시는 성전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성전에 참여하게 된 이들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라 확신한다. 애초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건물 대장에 교회로 기록된 건물로 부르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성령님이 임하고 계신 우리 모임을 교회라고 하시며, 세상으로 부르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거룩은 ‘구별되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의 신앙의 표준(normal)은 건물 대장에 교회라고 기록된 건물 안에서만 모여, 각자의 신앙 수준을 가늠하는 차원의 것은 아니었을까? 즉, 세상 속에서조차 ‘구별된 신앙’이 아니라, 단지 세상과 ‘분리된 신앙’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세상 속에서 구별된 모습으로 살아, 삶의 예배를 회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디모데전서 4:5). 즉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우리는 거룩하여지고, 그렇게 세상 속에서 살지만 구별된 모습으로 살면, 우리 삶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가 되는 것이다. ‘3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1명이나 2명이 한 행동을 반복하면 별 영향이 없지만, 3명이 한 행동을 반복하면 모든 사람이 그 행동을 따라 한다는 것이다.
나는 2017년부터 SNS에 묵상 나눔을 이어오고 있다. 함께 할 2명의 동역자를 만나기 위한 기도를 하면서 말이다. 혹시 이러한 묵상 운동을 평소 꿈꾸어 오셨던 분이 계신다면 연락해 주시면 좋겠다. 나의 결론은 이렇다. 뉴노멀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새로운 신앙의 표준은 예배를 대면으로 드릴지, 비대면으로 드릴지, 시대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어떤 과학기술을 사용해서 효과적으로 비대면 예배를 진행할지 등으로 가늠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새로운 표준은 오직 삶 전체로서의 ‘예배의 회복’이기 때문이다. 모든 삶의 자리에서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져서, 복음을 들고 세상 한복판에서 오직 성령님의 능력으로 구별되게 사는 청년 그리스도인들이 되길 기도한다. 그렇게 우리 각자의 삶의 예배가 회복되어, 온 땅 구석구석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예배의 처소가 되는 그날을 기도하며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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