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코로나 19’로 비대면 생활이 일상화되면서 온라인의 활동이 확산 일로에 있다. 이런 현상은 미술계에 영향을 주고 있다. 각국의 화랑과 미술관, 그리고 아트페어에서는 온라인상의 가상전시를 통해 감상자들을 끌어모으고 있고 작가들 역시 첨단기술을 활용한 가상전시를 적극 이용하는 편이다. 이와 같은 방식은 이전에도 간간이 이용해왔으나 팬데믹 상황을 맞아 대세가 되고 있는 느낌이다.
온라인의 장점은 장소 불문하고 작품을 감상할 수 있게 한다는 점이다. 관심은 있으나 전시장을 방문하기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다 작품의 의도나 제작 경위, 미술사적 의의 등 작품 설명도 해주니 일거양득이다. 그러나 온라인상의 발표와 작가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런 흐름을 역행하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 블록체인에 기반을 둔 NFT(대체 불가한 토큰) 아트의 흥행몰이가 그것이다.
트레버 존스(Trevor Jones)의 <비트코인 엔젤>은 이탈리아 조각가 베르니니(Bernini)의 <성녀 테레사의 황홀경>을 패러디한 것으로 <비트코인 엔젤>(그림1)에서는 천사가 불화살로 찌르는 순간 그녀의 가슴에선 비트코인이 와르르 쏟아진다.
그림1) 좌측) 베르니니의 성 테레사의 환상,1652년작, 우측) 트래버 존스의 비트코인 앤젤,2018년작
원작에서는 하늘로부터 ‘형형한 빛’이 내려오지만 디지털 작품에서는 가상화폐인 ‘비트코인’이 배경을 장악한다.
한 블록체인 회사는 뱅크시(Banksy)의 <모론>(Morons)을 파괴하는 장면을 담은 라이브 스트리밍 비디오(그림2)를 판매하며 “NFT와 실물이 모두 존재하면 작품의 가치는 실물에 종속된다.” “원화를 없애면 NFT가 대체 불가능한 진품이 되고 오히려 작품의 가치는 NFT로 옮겨간다”는 논리를 앞세웠다.
그림2) 뱅크시의 작품을 불태우는 비디오 장면
NFT가 증명하는 유일한 원본은 경매에서 구입한 이미지 하나뿐이라는 걸 입증해주는 블록체인의 기록이다. 구입자는 물성이 있는 무언가를 주고받지 않는다. NFT는 디지털 세계가 낳은 ‘복제품’을 ‘원본’으로 변환시켜 예술의 전통적 개념을 새롭게 정의 내렸다. 그것이 내용과 형식면에서 일종의 ‘스턴트’에 불과하다는 혹평을 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미술에서 ‘코로나 19’ 이후의 뉴노멀이 과거와 별반 다르지 않다면 크게 기대할만한 것이 못될 것이다. 뉴노멀을 개인주의와 물질주의를 넘어서 기독교적 세계관과 가치 체계에서 구해야 한다고 전제할 때 우리는 먼저 미술품이 지닌 기독교적 의미에 대해 성찰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가상의 도성’이 재화와 탐욕으로 치달을수록 ‘믿음의 도성’에서는 공감과 포용으로 나가야 하지 않을까?
빈센트 반 고흐의 <밤의 카페>(1888)(그림3)는 프로방스 아를의 카페 장면을 모티브로 한 것이다.
그림3) 빈센트 반 고흐, 밤의 카페,1888
시계 바늘은 밤 12시가 훌쩍 넘겼음을 알려준다. 빈 테이블에는 술잔과 술병이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거나하게 취한 사람들도 목격된다. 고흐는 이 그림을 그리며 “카페란 자아를 파멸시킬 수도 있고 미쳐버리게 하거나 죄를 범하는 곳이라는 생각을 표현하고자 했다”라고 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천정에 달린 가스등의 불빛이 눈길을 끈다. 그 빛이 사람들을 비춘다. 그것은 <감자먹는 사람들>에서도 나타났던 ‘은총의 불빛’이고 ‘구원의 불빛’이다. 고흐는 이들에게도 구원의 손길이 미치고 있음을 표현한 셈이다.
기드론 골짜기는 에스겔이 환상 중에서 생명과 풍요가 넘치는 장소였지만 다윗에게는 패역한 압살롬의 위협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도망쳤던 치욕과 고난의 장소였다. 우리는 안락과 편안함을 바라지만 구원의 자리는 오히려 고난의 자리 속에 있음을 알려준다. 고흐는 고통스럽고 괴로운 나날을 보내는 사람들에게 눈길을 돌리는 동시에 그들을 ‘하나님의 큰 잔치’의 손님으로 바라보고 보았다.
한편 필자는 그리스도인 작가들에게 뉴노멀 시대에 무엇이 중요한지 물어보았다. ‘부케와 아바타로 은폐한 개인들을 참 진리와 사랑으로 끌어안아야’(서자현),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람들과의 사랑의 나눔’(최진희), ‘빚진 자의 마음으로 익숙한 삶의 패러다임을 변화시켜야’(김정희), ‘기독 문화의 바운더리를 넓히는 기회’(김명희),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서는 것이 중요’(정해숙), ‘소중한 일상의 재발견’(이윤동), ‘관계의 촉진에 나서야’(장지희) 등. 그리스도인 작가들은 기독교의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가치를 중시하며 이를 어떻게 창의적으로 풀어갈지 고민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예술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 그 자체로 유의미할 뿐만 아니라 의미 있는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한다. 작가들은 비대면의 상황에서도 창작활동을 통해 사람들을 팬데믹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게 도움을 주고 사람들의 결속력을 높이는 역할을 해오고 있다. 나아가 두려움과 불안에 빠진 사람들에게 하늘의 평강과 위로를 전한다면 최고로 멋진 일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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