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한국인들은 교육열이라 하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러나 사실은 교육이나 학문 자체에 대한 간절함이 부족하다는 비판도 자주 받는다. 그 말인즉, 우리는 공부 자체보다는 공부의 결과를 더 추구해왔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 모순적인 사실을 꼭 집어서 누가, 왜, 어디서부터 이렇게 되었다고 설명하기는 어렵다. 워낙 오랫동안 우리 민족의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인 DNA로 굳어져, 자연스럽기까지 한 우리의 성향이 되었기 때문이다. 유교적 세계관의 영향을 강력히 받아온 우리 선조들에게 교육의 최종 목표는 과거 급제를 통한 입신양명(立身揚名)이었다. 이 DNA를 이어받은 것뿐만 아니라 우리는 힘겹고 치열한 근현대사를 거치면서 학벌을 통해서라도 개천에서 용이 되어 보려는 교육 열기로 온 나라를 후끈 달아오르게 했다.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수혜를 누린 편에 더 가깝다. 서양 문화를 일반인보다 비교적 쉽게 접할 수 있었던 기독교 지성인들은 일찍부터 미국을 비롯한 서구 사회 유학을 통해 한국 사회의 리더십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필자의 경우도 늦은 나이에 유학을 감행했던 동기가 결코 학문 연구에만 있지 않았다. 어린 시절 로망이었던 미국 유학을 통해 교육계에서 좀 더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고 싶었다는 점을 인정한다. 모든 기독교 지성인들을 한꺼번에 폄하하지는 말아야겠지만, 많은 경우 한국 사회에 기독교적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 채 그들만의 리그를 벌여왔다는 아쉬운 성찰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 무렵부터 교육계에 상이한 두 진영에서 변화의 움직임이 포착되었고, 그들은 흥미롭게도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한 진영은 유학을 통해 서구 기독교 문화를 경험했던 기독교 학자들이었다. 주로 미국 지역의 기독교 학교에 자녀들을 보냈던 그들은 귀국 후 한국의 획일적이고 경쟁적인 교육 풍토의 문제점들을 인식하고 이에 대한 기독교적 대안을 마련하려는 노력을 시작한다. 우선은 자녀들을 공교육 학교에 보내지 않고 부모가 직접 홈스쿨링을 하는 가정들이 생겨났다. 또 작은 공동체를 이루어 나름의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사례들도 빈번해지기 시작했다. 한편 중대형 교회나 유력 인사들을 중심으로 학교를 설립하려는 시도들이 이어졌다. 그중에는 공교육 기관으로 인증된 학교도 있으며, 많은 경우 공교육 못지않은 시설과 인적 물적 자원을 탄탄하게 갖춘 대안학교들이 속속 설립되었다.
또 하나는 전자에 비하면 덜 주목받으면서도 꾸준히 긍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해온 토착적인 대안교육 진영이 있었다. 우리 아이들은 더 이상 부모 세대가 교육 현실을 감내하던 방식으로 학교생활을 감당하려 들지 않았다. 아직 어려서 근본 문제가 무엇인지 제대로 인식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직감적으로 자신과는 맞지 않는 학교라는 거대 조직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학교를 떠나는 아이들이 많아졌다. 우리 사회는 이 아이들을 한동안 사회부적응아, 혹은 비행 청소년으로 규정하고 분리시켰다. 그런데 그들에게 손을 내밀고 끌어안아 교육을 계속할 기회를 열어준 작은 교회, 개인, 단체들을 통해, 우리 아이들이 본연의 사랑스러운 모습들을 되찾아 가는 작은 기적들이 일어난 것이다.
두 진영 모두 미인가 대안학교라는 이상한 용어로 규정된 사회적 차별 속에 진정한 기독교 교육을 실천하기 위해 20여 년의 세월을 견뎌왔다. 2020년에 ‘대안교육법’이 통과되면서 어느 정도의 법적인 지위를 보장받을 길은 열렸다. 하지만 아직 기독교 대안교육이 지극히 한국적인 세계관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 보인다. 학교 밖 청소년들을 위한 작은 대안학교를 운영하는 교장 선생님 한 분을 기억한다. 간신히 아이들 마음을 붙들어 안정적인 생활을 하게 되면 어김없이 부모들이 대학 입시 교육을 요구한단다. 이 상황이 마치 물에 빠진 사람 구해놨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것 같다며 한껏 풀 죽은 표정을 지으시던 그분의 손등에는 자해하려는 아이를 보호하려다 대신 찔린 깊은 칼자국 상처가 훈장처럼 빛나고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대안학교’라는 용어가 낯설지 않은 좋은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한국 사회가 전통적으로 가진 세계관의 영향력 속에서는 진정한 기독교 교육의 방향성이 여전히 불투명하다. 그렇다고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지 않겠나?
필자는 이 시점에서 우리 기독교세계관동역회가 기여할 영역이 있다는 기대를 가져 본다. 각자 고군분투하며 교육 풍토 변화를 위해 헌신해온 대안 교육가들에게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어요”라는 인사를 건내야겠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지향해야 할 참된 기독교세계관적 삶에 “저희도 함께 가겠습니다.”라는 겸손한 제안을 드리고 싶다. 사변적 논의가 아니라 삶으로 살아내는 기독교 세계관은 오히려 그 무명의 교육가들에게서 배워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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