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나는 서울역 근처 쪽방촌에서 빈민들을 섬기는 ‘소망을찾는이교회’ 전도사이다. 현장 사역자로서 종종 직면하게 되는 물음은 이런 것이다. “선교하지 말자는 것인가? 복음과 그 전파의 행위 자체가 문제이며 존중의 행위로 여겨질 수 없다는 결론에 봉착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빈민들을 선교하는 주체로부터 타자화하고 그들의 관습과 가치관을 죄악으로 규정한다 해도 그것을 상쇄할만한 희생과 애정과 열정적 말씀의 섬김과 불쌍히 여기고 함께하는 것이 있다면 상관없지 않은가?” 확실히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이다. 그러나 끊임없는 고민을 하게 한다. “어떤 경우에도 타자성을 파괴하거나 상처 주지 않는 복음 선포는 없는 것일까? 도대체 복음이란 무엇인가?” 이러한 고민에 기초하여 필자는 빈민들을 대상으로 한 선교론의 대안적 방향을 다음과 같은 다섯 단계로 제시해 본다.
첫째 단계, 우리에게 선교는 최종적인 목적이지만 우선 그 선교를 전제하지 않은 타인과의 만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것이 어떠한 의미로든 판단에 영향을 미치치 않게 내려놓고 빈민들의 역사와 문화와 그들의 사정을 자세히 살피는 것이다. 그들의 삶에 대해, 삶은 어떠해야 한다는 신앙적 판단과 우리 자신이 이들에 대해 느끼는 사명감 같은 것을 개입시키지 말고, 그대로 듣고 사실을 그저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둘째 단계, 교회는 “빈민들에게 뭘 해 줘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아니라, 그들이 기존 선교에 느낀 불만이 무엇인지, 어떤 말과 행동이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지는지를 최대한 하나하나 분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복음을 전해 받는 자들의 문화를 존중하고 대화하는 것은 단지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함이 아니다. 그들을 죄인이라고 선포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을 그들 앞에서 죄인으로 세우기 위함이다. 복음을 전해야 하는 대상에 대한 우리의 감정과 인식에 부정과 긍정이 충분히 균형 잡힐 때까지 이 과정을 계속 수행해야 한다. 이때 중요한 점은 어설픈 긍정은 하지 않는 것이다. 반드시 그 대상이 가진 조건으로만 긍정할 필요는 없으나, 그 긍정은 결코 단순한 전도자의 동정과 애착심에 근거해선 안 된다. 왜냐하면 대상자의 문화와 삶의 양식을 여전히 경멸하면서도 긍휼과 사랑의 대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셋째 단계, 우리가 가진 복음과 신학에 근거하여 대상자들의 삶과 특징에 대하여 긍정하고 칭찬할 수 있는 활용지점을 찾는 것이다. 복음의 기본 내러티브인 ‘죄와 구원’의 관점을 일단 보류하고, 이들이 이미 하나님과 관계없지 않음을 이들의 구체적 특성과 삶의 이야기, 주변 상황의 조건 등을 근거로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이 작업은 복음을 단순한 이신칭의만이 아닌 복음서의 하나님 나라 메시지 전체를 포함하는 것으로 제시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빈민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지 않는 상태라는 것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
넷째 단계, 복음이 이들에게 ‘긍정과 환대와 찬사’의 소리로 선포될 때, 당사자들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기 경멸의 측면, 스스로 강렬한 죄책감이 드러나 한탄하는 부분, 죄를 강하게 느끼는 부분을 찾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점’이다. 전파대상에 대한 전파자의 의식이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부활을 겪는 일이 먼저다. 이 부활을 겪게 되었을 때, 자신에 대해서 말하는 당사자 본인의 목소리가 전도자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부정적인 부분이 있다면, 굳이 무리하게 긍정할 필요가 없다. 이때가 바로 죄와 구원 안에서, 그리고 십자가 사랑의 복음 안에서, 그들의 고백을 진지하게 받아주는 시간이 된다. 필자는 분명히 밝힌다. 인간의 죄와 하나님 사랑의 복음을 핵심으로 하는 전통적 메시지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이 문제가 없는 것으로 불신자 빈민들에게 선포되기 위해서는 선교대상에 대한 전도자의 인식과 신학의 변화가 선행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할 때 전도자는 자신이 복음을 말하기 전에, 이미 대상자의 삶의 내용과 자기 인식적인 심리 안에. 복음을 받아들이기 위한 상당히 많은 것들이 준비되어 있음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다섯째 단계, 기독교의 복음, 즉 ‘죄와 구원’이라는 성경의 특수한 ‘자기 기술’(self-description) 이야기가 비로소 자유롭게 나누어져도 괜찮다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단계에 의해, 이미 전도자는 빈민들의 세속성조차도 단순하게 그것을 죄악 된 모습으로만 가두어두고 볼 수 없는 상태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기독교가 지향하는 거룩함과 경건의 새 모습이 그들에게 나타나야 함을 전파하되, 이 새 삶의 모습은 지금까지 그들의 삶을 구성해 온 특유의 정체성을 꼭 배제하지 않고서도 하나님 앞에서 일치된 ‘거룩성’으로 승화될 수 있는 것임을 깨닫게 해 줘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새 삶을 산다는 것, 즉 복음 안에서 산다는 것은 이전의 자기 개성과 기질을 모두 버리거나 부정하게 되는 것이 아님을 예배와 기도와 각종 신앙교육을 통해 각성하도록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 빈민들이 결국 거듭나서 복음을 전하는 멋진 전도자로 각성하게 하는 방안에 대해서 말하겠다. 우리는 빈민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고도 여전히 그들에게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는 세속성,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세속성, 복음 바깥에 있었을 때 그들의 모습이었던 사람들과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이 세속성을 그대로 존중해야 한다. 만약 불신자 빈민들을 전도하는 불신자 빈민 출신 성도가 불신자 빈민들과 같은 모습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이 하나도 없이 비추어지는 것은 반드시 좋은 일만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필자는 복음과 신앙 안에서 세속성을 버리거나 혐오하며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세속성이 복음의 내용으로 변혁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복음의 빛에 조명되었을 때, 빈민들은 복음 이전의 자기 삶조차 사랑하게 되었다는 사실, 그렇기에 그들이 복음 바깥에 있는 대상자들과 자신을 여전히 똑같이 여기게 된 것을 기뻐한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필자가 생각하는 빈민 선교의 대안이다. 결국, 타자를 대상화하지도 않고 자기 회귀로 환원시키지도 않는 선교는 다음 같은 것이다. 즉, 불신자 빈민 출신 성도가 동료 빈민들과 달라졌으면서도 그 동료들로부터 같은 모습으로 인정을 받고 이 땅에서 그들과 함께 살아가며 선교하는 것이다.
이용약관 | 개인정보 취급방침 | 공익위반제보(국민권익위)| 저작권 정보 | 이메일 주소 무단수집 거부 | 관리자 로그인
© 2009-2024 (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고유번호 201-82-31233]
서울시 강남구 광평로56길 8-13, 수서타워 910호 (수서동)
(06367)
Tel. 02-754-8004
Fax. 0303-0272-4967
Email. info@worldview.or.kr
기독교학문연구회
Tel. 02-3272-4967
Email. gihakyun@daum.net (학회),
faithscholar@naver.com (신앙과 학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