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종교개혁 이후 예술적 유산의 중요성을 조명한 미술사학자로 네덜란드의 한스 로크마커(Hans Rookmaaker 1922-1977)를 들 수 있다. 그는 세계 제2차 대전에 해군 장교로 참전하였다가 나치에게 잡혀 우크라이나 감옥에 구금, 그곳에서 성경을 접하였으며 개혁교회의 철학자 메커스(J. P. A Mekkes)를 만나 개혁신앙에 눈을 뜨게 되었다. 메커스를 통해 알게 된 도예베르트(Herman Dooyeweerd)와 카이퍼(Abraham Kuyper), 프린스터러(Groen van Prinsterer)는 훗날 그의 이론 체계를 정립하는 데 밑거름이 되어주었다.
그의 연구 방법론은 다른 미술사학자들과 구별된다. 그는 전통적인 방식인 양식사적으로 미술에 접근하는 대신 어떤 철학과 사상이 예술에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정신사적 관점에서 접근하였다. 예술가의 철학적인 사상이 그림에 투영되어 있다는 것이 그의 이해 틀이었고 이를 자신의 박사학위논문 <고갱과 19세기 미술 이론>에 담았다. “로크마커는 미술사를 철학과 종교 역사의 직접적인 반영으로 보았다. 이것은 미술을 양식적 발전의 연속으로 보던 상황에서 꽤나 신선한 것이었다.” 그의 제자 존 월포드(John Walford)의 말이다.
<학생들과 토론하는 한스 로크마커>
로크마커의 생애를 보면 한 명의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세상을 바꿀 수 있는지 보여준다. 암스테르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1964년 자유대학교(VU)에 미술사학과 교수로 초빙을 받아 12년간 봉직하게 된다. 이 무렵 로크마커는 스위스 라브리(L'Abri)를 이끌었던 프란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와 의기투합하여 자신의 자택을 ‘네덜란드 라브리’(Dutch L'Abri)로 삼고, 세계 여러 나라에서 몰려온 청년들에게 기독교의 관점에서 예술을 바라보는 법을 가르쳤다.
“기독교와 예술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은 로크마커의 집에서 매일 모임을 가졌다. 과제도 상당히 많이 내주었다. 우리는 문화, 교회의 예술에 대한 인식, 도상학 등과 관련한 미학에 대해 토의하였다. 소박한 거실에는 재즈와 블루스 레코드 컬렉션이 들어차 있었는데 강의 후에는 종종 레코드를 틀어주기도 했다.”(데이브 헤게먼, Dave Hegeman)
강의는 집뿐만 아니라 미술관으로 이어졌다.
“가장 중요한 시간은 아침에 레이크스 미술관을 매주 관람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한 점의 그림 앞에서 몇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맨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지만 차츰 그러한 시간이 작품의 가치를 깨닫게 해준다는 사실에 보람을 느꼈다. 로크마커는 까다로운 질문을 하는데 매우 능숙했다. 그런 질문을 통해 그는 스타일 배후에 숨겨진 의미를 탐사하고자 했고 그것은 썩 흥미로운 시도였다.”(폴 클라우니, Paul Clowney)
그의 지론은 “당신이 아는 것을 보는 것이다”(You see what you know)라는 것이었으며, 현장 교육을 통해 학생들이 작가가 표현하는 바와 그 이면의 사상을 꿰뚫어 볼 수 있도록 했다. 그는 진지한 토론과 이와 관련된 과제를 수시로 내주어 그것이 종교적인 것이든 세속적인 것이든 미술품을 해석할 때 학생들이 기독교적 준거 체계로 바라볼 수 있게 하였다.
그는 학자로서 훈련을 받았으나 그의 지식을 실천적으로 사용하는 데에 힘썼다. 자유대학교 재임 시절 전부터 그는 스위스 라브리를 방문하여 참석자들에게 강연과 토론을 했고 나중에는 밴쿠버 레전트 컬리지(Regent College)의 서머스쿨, 영국의 미술관과 대학 강의, 세미나 발표를 진행했다. 또 미국의 각 지역을 순회하며 기독교 컬리지와 인터버시티 컬리지 펠로우십(*영문 표기 필요)에서 미술과 현대음악, 문화, 그리고 신앙에 관해 토론하였다. 로크마커는 자신을 부르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가 자신의 비전을 공유하였다.
당시 서구의 복음주의 국가에서는 예술을 등한시했는데 오히려 로크마커는 그리스도인의 문화 참여를 독려하여 그리스도인들을 동면(冬眠)에서 깨어나게 했다. 그는 현대미술을 조롱하지 않고 현대미술이 표방하는 철학적 중요성을 파악해내고 염세주의적인 메시지를 밝혀내며 이를 청중들에게 전했다. 청년 시절 ‘트라우’(Trouw)지에 평론을 기고하였던 경험을 살려 그는 최신 조류와 접촉하고 비전문가인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었다. 그는 조르주 루오(Georges Rouault)의 ‘비극적 영웅’과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의 추상이 지닌 아름다움에 대해선 우호적이었으나, 피카소와 몬드리안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1960년대 ‘해프닝’(Happening)과 같은 현대미술의 선구자들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로크마커는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하는”(고후 10:3-5)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전했다.
<사후에 발간된 로크마커의 전집>
많은 사람들이 그의 영향을 받았는데 이중에는 영국의 화가 폴 크라우니, 피터 스미스, 폴 마틴, 케이트 로스, 영화배우 니글 굿윈, 미국의 조각가 테드 프레스콧, 미술사학자 월 포드, 신학자 빌 에드가와 백비, 윌리엄 더니스, 화가 크리스 앤더슨, 네덜란드의 마르크 데 클라인, 반 룬, 토론토의 메리 모비, 테나 에이레스, 로저 팬먼, 웨인 로사, 메리 애쉬크로프트, 베티 스팩먼 등이 있다. 경건주의에 빠져 그림을 포기할까 고민하던 학생에게 다시 붓을 들게 한 일도 있었다.
그는 예술가들을 섬긴 그리스도인으로 세찬 풍랑의 현실 속에서 살아갔다. 그 덕분에 ‘예술적 팔레스타인’에 처해있던 예술가들에게 성경이 말하는 진리와 미에 관심을 돌리도록 했다. 그리하여 개신교에서 그동안 간과해온 예술도 문화명령의 한 영역임을 환기시켰다. 미국의 미술사학자 제임스 로메인(James Romain)은 자신을 로크마커의 ‘소명의 손자’로 소개한 바 있다. 자신의 스승인 휘튼(Whitten) 대학의 존 월포드(John Walford)가 로크마커에게 수학했으므로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이처럼 그가 세계 각국의 그리스도인들의 멘토로 남게 된 것은 예술 참여를 통해 문화의 세속화를 막으려는 그의 열정적인 학자적 소명과 하나님 나라를 향한 헌신에 있을 것이다. 교회가 ‘동력의 산실’이 아닌 ‘기관’이 되어가는 고통스런 현실을 보면서 문뜩 그의 이름이 떠오르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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