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어떻게 살 것인가 : 성경적 문화 신학의 입장에서
추천 : 웨슬리 윈트어스 (선교사), 해제: 황영철 (수원 성의교회 담임목사)
<Created and Creating : A Biblical Theology of Culture> / William Edgar / IVP / 2016
진실한 신자의 가장 큰 질문은 항상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가에 대한 것이다. 대답이 상대적으로 명료한 도덕적 문제들은 그 관건이 지식이 아닌 능력에 달려있다. 하지만 어떤 문제는 시대와 역사를 이어가면서 계속 연구하고 논쟁하고 토론할 수밖에 없다. 즉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이 세상의 현실 속에서 진정한 신자다운 삶인가 하는 것이다.
저자 윌리암 에드가(William Edgar)는 이 책에서 이 문제를 그리스도인의 문화참여라는 관점으로 접근했다. 어떤 의미에서 삶은 문화적 활동의 일부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이 책을 그리스도와 문화에 관한 책이라 하고, 어떤 이는 기독교와 문화에 관한 책이라고 한다. 하지만 저자가 붙인 부제가 이 책의 성격을 좀 더 정확히 묘사해 주고 있는 것은 저자가 붙인 ‘성경적 문화 신학’(A Biblical Theology of Culture)라는 부제이다. 저자는 문화를 성경 신학적으로 다루고자 했다. 이것은 매우 흥미로운 시도이다. ‘문화’와 ‘성경 신학’이 그다지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말은 아닌 까닭이다. 하지만 저자는 그 작업을 충실히 해냈다.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문화 연구의 발전에 대한 개괄적 소개이다. 이것은 다시 세 측면으로 나누어진다. 첫째 단계는 문화를 고상한 정신 예술적 업적과 동일시하면서 사람의 정신세계를 고양시키는 수단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둘째 단계는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문화를 권력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셋째 단계는 문화 연구와 이해의 파편화라 할 수 있다. 인간론이 문화 연구의 중심이 되면서 문화에 대한 다양한 이해들이 제시되고 있다. 저자는 1부를 마치면서 문화에 대한 이와 같은 연구와 이해 개진으로 신자가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을 무비판적으로만 받아들일 수는 없다. 거기에는 비성경적 요소 또한 많기 때문이다. 1부는 너무 많은 내용을 짧은 지면에서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이 분야에 관심 있는 독자는 문화 연구의 최신 자료의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저자는 각주에서 풍부한 인용 자료와 참고 문헌도 제공함으로써 후속 연구에 도움을 주고 있다.
2부에서 저자는 이른바 ‘콘트라 문덤’(contra mundum) 본문을 다룬다. 즉 세상에 대해서 부정적 입장을 취하는 듯 보이는 성경 본문들이다. 저자는 각각의 본문을 인접 문맥과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비추어서 다시 설명함으로 그 본문들이 실제로는 세상에 대해서 부정적 입장을 가르치는 것이 아님을 보여 주고자 한다. 이 부분은 때때로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해석도 있지만, 저자의 논지는 여전히 건전하고 설득력이 있다.
3부 ‘문화명령’은 저자가 정작 하고 싶었던 ‘성경적 문화 신학’ 작업이다. 저자는 두 왕국 이론, 복음 전도와 문화 활동, 특별은혜와 일반은혜 같은 이원화된 구분에 대해 대체로 부정적이다. 그는 이 문제에 관해서는 어떤 신학자의 주장에도 반대한다. 이는 저자가 문화명령과 복음전파의 명령을 별개의 것이 아니라 서로 얽혀 있는 하나의 명령으로 생각하는 까닭이다. 저자는 그 증거로 창 1:28의 문화명령을 구속의 명령과 함께 등장하는 관련 성구로 제시한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의 후손은 장차 번성하여 온 세상에 퍼져 왕 노릇 하리라는 약속은 창 1:28의 생육하고 번성하여 온 세상에 가득하며 땅의 모든 것을 다스리라는 약속과 본질상 같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어 구원의 언약은 그 안에 이미 창 1:28의 문화명령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처음에 다소 낯설게 느껴지던 이러한 설명은 유사한 사례가 반복적으로 제시되면서 점점 설득력이 강화된다.
저자의 접근은 미묘하지만 선명한 차이가 있다. 즉 많은 그리스도인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번성하리라는 약속을 신약 교회의 출현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될 뿐 그것을 창세기 1:28의 문화명령과 연관 짓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표현이 렘 29:6에도 등장한다. 저자는 이 구절과 창 1:28의 표현상 유사함을 발견하고 렘 29:6을 문맥 속에서 문화명령과 연결시켰다.
우리는 저자의 이러한 정교하게 설득력 있는 논지가 아니더라도, “구원은 신자의 삶으로 표현되어야 한다”라는 원리를 곰곰 생각해 보면, 구원과 문화명령이 분리할 수 없이 얽혀 있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신자가 삶으로 하는 일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결국 그 시대와 사회의 문화에 참여하여 그것을 누리거나 그것으로 인해 박해를 받거나 변화시키거나 발전시키는 것이다. 여기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러한 사실은 문화명령이 타락 이전과 이후에 변함없이 작동한다는 증거이다. 저자도 인용한 월터스(Albert Wolters)의 표현을 빌자면, ‘구조와 방향의 문제’이다. 문화명령의 구조는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하여 한다. 방향이 거꾸로 된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문제를 해결하여 인간의 모든 문화 활동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게 하는 것이 구원임을 지적한다. 물론 구원은 그 이외의 많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지만, 문화명령의 회복이 구원의 주된 목적이다. 그래서 저자는 문화명령의 원형, 타락된 형태, 회복된 모습을 다룬다. 인간은 처음부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가득하여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을 하나님을 대리하여 관리하고 다스리는 존재로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문화 활동은 인간의 일부가 아니라 그의 삶과 활동의 모든 것이다. 따라서 구원이 문화명령의 회복과 무관할 수는 없다. 때문에 이 책은 여전히 ‘콘트라 문덤’이 만연하는 교회들에 좋은 자극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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