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불안’은 이 시대 청년들의 상태를 가장 잘 드러내는 말이라고 한다. 이들은 청소년이던 1997년 IMF와2008년 세계금융위기로 생존 기반을 위협받은 부모와 선배 세대를 목격했고, 2010년에는 소위 ‘단군 이래 최고 스펙’을 가졌음에도 금융위기의 여파로 ‘이태백’(20대 태반이 백수), ‘사오정’(45세 정년) 현상의 당사자가 되었다. 이후 2014년 세월호 참사, 2016년 국정농단, 그리고 2020년부터 현재진행형인 ‘코로나 19’ 재난을 연속적으로 경험했다. 청년들의 의식/무의식 속 ‘불안’은 이러한 부정적인 외부 경험들에 의해 쌓여 온 두터운 정서라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물론 앞서 열거한 사회적 위기들은 세대를 막론하고 그 시대를 살았던 모두가 마주한 불행이지만, 청소년기를 막 벗어나 잠재력과 자유를 펼칠 준비를 한 이들이 기지개도 켜보지 못한 채 위축되어 버리게 만든 일들이었다. 특히 2030 세대는 그 시기에 진학과 취업, 결혼과 출산 등 인생 전반에 걸친 중대한 결정을 해야 하기에 사회적 변화와 위기를 체감하는 정도와 영향이 남달랐을 것이다. 저성장과 ‘코로나 19’로 인해 다양한 경험의 기회와 선택의 폭이 좁아지고, 신분과 자원의 불평등은 심화되며, 사회적 안전망에 대한 신뢰가 깨어지고, 계층, 세대, 성별 갈등의 심화로 공동체와 공동선에 균열이 생기고, 관계는 최소화되거나 단절되고 있는 2021년의 현실 위에 청년들은 어쩌면 겨우 홀로 버티며 서 있다.
그동안 청년들에게 붙여졌던 이름표들을 떠올려보자. ‘88만원 세대’라 불리던 사회초년생들은 점차 노동소득과 자본소득의 허무한 ‘갭 차이’를 헤아리게 되고 결국 주식과 부동산 열풍 가운데 누구는 ‘벼락 거지’로 누구는 ‘파이어족’*으로 변모한다. ‘부모보다 가난한 첫 세대’가 될 거라는 비보에 ‘밀레니얼 세대’들은 부모와 자신을 건사할 예산을 생각하며 비혼과 비출산을 결심한다. ‘N포 세대’는 오늘의 나에 집중하는 ‘욜로’로 살며 보상받고 충족하려 하거나, 현생에의 ‘피투성’(던져짐)이 아닌 주체성에 의한 거부 의지로써 ‘N포 담론’을 해체하기도 한다. 따라서 요즘 청년들이 추구하는 것이 '행복'이 아닌 ‘안정’이라는 말에 쉽게 동의가 된다. 불안으로 인해 치열해지거나, 막막함 속에 무기력해지는 감정들 사이에서 청년들은 평범한 생존을 확보하고 일상과 마음의 ‘안정’을 우선으로 추구하는 것일 테다.**
겨우 버티고 서 있는 청년, 동시에 이름 그대로 푸르름과 찬란함을 잃고 싶지 않은 청년들은 과연 교회에서는 어떤 존재이며 어떤 상태일까? 일상에서 분투하는 가운데 사회경제적으로 또 심리적으로 위기에 처한 청년들이 교회 공동체에 기대하는 것은 무엇일까? 필자가 강의하거나 글을 쓸 때 반복하는 말이 있다. “교회의 미래를 위해 청년을 논하지 말라. ‘청년의 오늘’을 위해 교회를 바꾸라”라는 것이다. 청년들의 특징, 삶과 신앙의 고민이 주목받고 회자되는 것에 비해 실제로는 교회나 기성세대가 그 변화된 청년 세대의 특징을 받아들이거나, 해결책이나 응답을 잘 내놓지 못하는 것 같아 답답함을 느낄 때가 있었다. 여전히 기존의 구조와 관점 안에서 ‘교회 중심’으로 청년 문제를 바라보고 해석하려는 태도 때문일 것이다. 아니다. 지금 여기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청년의 오늘에 집중하고 그 문제에 대해 대화하고 함께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소위 ‘생애주기’를 오롯이 통과하는 것과 ‘정상 가족’의 형태를 만들고 유지하는 것은 앞으로 더욱 더 환상에 가까운 일이 될 것이다. 교회와 목회자는 그 전통을 고집하기보다 청년들이 선택하는 다른 삶의 모습 이면에 어떤 사연과 씨름이 있었는지 대화하는 것에 힘을 들여야 한다. 따뜻한 말 한마디보다 어떤 잣대와 편견을 먼저 내미는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 아직 겨우 남아 있는 청년들마저 상처입고 쓸쓸히 돌아서게 하는 잘못을 반복할 것이 분명하다. 학업보다 노동이 필요한, 결혼이 두려운,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취업을 위해 이력서를 70통 넣었던, 그런 사연들에 귀 기울이는 태도로 말이다.
2020년 8월부터 시행 중인 <청년기본법>은 청년 발전, 청년 지원, 청년 정책에 대해 명시하고 있다. 청년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실현하고 권리를 보장받으며 민주시민으로서의 책무를 다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함이라는 청년기본법의 취지와 방향은, 한국 교회가 청년 사역에 그대로 빌려와도 좋을 내용이다. 그리고 매년 9월 셋째 주 토요일은 ‘청년의 날’로 지정됐다. 교회도 그날 즈음, 청년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청년이 살아가는 사회 현실을 떠올리며, 청년을 위해 기도했으면 한다. 청년이 살만한 세상, 청년이 있고 싶은 교회를 만들기 위해 예산 편성, 의사결정 및 참여 구조 개편 등에 있어 이전보다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노력을 기울여 줄 것을 당부하고 싶다. 그렇게 된다면 청년과 교회는 또 하루, 한걸음 더 함께 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청년과 공존하며 소통하는 교회가 되기 위한 방법을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해 보았다.
첫째, 안전한 곳이여야 한다. 온전한 나로 존재할 수 있도록 인내와 포용이 머무는 곳, 시행착오에도 비난하거나 배제시키지 않고 오히려 위로를 주고 재도전을 가능하게 하는 교회는 청년에게 안전한 곳이다.
둘째, 공감 능력을 키워야 한다. 성도들이 청년의 이야기에 먼저 “그랬구나”라고 할 수 있다면,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는 불의와 약자들의 고통에 반응하고 손 내밀 수 있는 교회에 청년들은 깊숙이 연결된다.
셋째, 민주적이어야 한다. 교회 구성원 모두가 동등하게 존중받고, 발언과 참여의 기회가 동등하게 보장되는 곳에서 소속감과 자발성, 활력이 생겨나며, 교회도 함께 건강해진다.
청년의 일상과 고민의 진폭은 주로 사회의 변화와 위 세대와의 작용에 의해 그 깊이와 넓이가 달라지기에 청년 문제는 청년만의 문제가 아니다. 따라서 청년의 진폭에 따라 우리 사회는 청년을 수용하고 껴안을 수 있는 유연하고 너른 품을 가져야 할 것이다. 교회 또한 그 품을 만들어 갔으면 한다. 낡고 굳어버려 청년에게는 희망을 보여주지 못하는 교회라는 오명을 씻고, 청년의 오늘에 시선을 맞추고 청년과 소통하며 동행하는 한국 교회가 되어주기를 청년을 살아가는 당사자이자 청년을 지원하는 활동가로서 바라고 기도한다.
* 파이어 족은 30대 말이나 늦어도 40대 초반까지는 조기 은퇴하겠다는 목표로, 회사 생활을 하면서 20대부터 소비를 극단적으로 줄이며 은퇴 자금을 마련하는 이들을 가리킨다.
** 모든 인간이 그렇듯 청년 또한 입체적이기에 오늘날 청년들의 이러한 선택과 삶의 양상에는 당연히 더 복잡다단한 원인과 역동이 있고, 또 모든 청년에 해당되는 것은 아님을 염두에 두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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