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나는 현재 이른바 중소 ‘게임업체’에 다니고 있는 청년이다. 학부에서 신학을 전공했지만, 목회자의 길은 나의 소명이 아님을 확인한 후, 현재 직종에서 즐겁게 일하고 있다. 내게 그리스도인 청년 직장인으로서의 도전은 입사 첫날부터 시작되었다. 내 학부 전공을 알게 된 부서원들은 우선 주일에는 회사에 중요한 일이 있더라도 출근을 안 할 사람으로 우려했다. 게임업체는 직종 상 업무량이 많은 시기가 올 때, 주말에도 회사를 출근해야 할 경우가 있다. 아니나 다를까, 입사 두 달이 채 되지 않았을 때, 바로 그 시기가 왔다. 직원 대부분은 당연하다는 듯 토요일, 일요일 모두 출근을 예정하고 있었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고심했다. 내가 만약 연차가 높은 시니어 직원이었다면 당당하게 “토요일까지만 출근할게요”라고 말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아직 수습 직원이었기에, 이 기간에 열정과 실력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으면 정규직 전환에 실패할 수 있다는 것을 고심했다. 고심 끝에 겨우 용기를 내서 팀장님께 이렇게 말했다. “팀장님, 정말 죄송한데요. 저는 일요일 출근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지만 토요일까지는 제게 할당된 모든 일을 다 끝내겠습니다.” 다행스럽게 이 부탁은 수용되었고, 나도 실제 토요일까지 할당 업무를 잘 마쳤다. 할렐루야! 나는 생각했다. 하나님께서 나의 신앙적 용기를 보시고 어여삐 여기셔서 그에 따라 명철한 지혜로 보답해 주신 것은 아닐까.
일터에서 나의 두 번째 신앙적 도전은 ‘직장 내 섬김’에 관계된 것이었다. 점심시간이 다가오면 나는 직장 부서의 막내로서 “오늘 메뉴는 OOO 어떠신가요?”라며 의견을 취합한다. 또 식당에 가서도 바로 앉지 않고 냅킨과 수저를 선배들 앞에 먼저 놓아준다. 개인적으로 빠르게 식사하는 습관이 있지만, 가장 늦는 직장 선배의 타이밍에 맞추려고 노력한다. 식후 카페에 가서 메뉴를 취합하여 직원에게 주문하는 것도 내 몫이다. 사무실 정기 청소 시간에는 남들이 가장 꺼리는 창틀 닦기 등에 앞장선다. 내가 직장 생활을 이렇게 시작하게 된 것은 교회에서 배운 바의 영향이 있었던 것 같다. 그 가르침의 최우선은 말씀에 대한 ‘순종’, 다음은 ‘섬김’이었다. 그러나 직장에서 이것을 온전히 이행하는 것은 내게 너무 어려운 문제였다. 첫째는 육체적으로 어려웠고, 둘째는 “나의 솔선수범에 다른 직원들이 너무 익숙해져 가는 것 같다”라는 점에 대한 불편한 마음이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라는 마음이 일어날 때도 있었다. 나보다 단지 몇 주 빠르게 입사한 직원이 나의 솔선수범을 당연시하며 받으려고만 하는 것을 보았을 때, 정말 마음이 힘들었다. 직장 생활을 시작하며 부서원들이 거의 모두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 같기에 시작한 솔선수범이었으나 대체 어느 수준까지 계속 이렇게 섬길 수 있을지 나도 내가 궁금해졌다.
일터에서 세 번째 신앙적 도전은 ‘직장 내 인격적 대우’와 관련되었다. 현재 일터의 문화 중 하나는, 직급이나 연차에 상관없이 무조건 존댓말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고작 몇 주 먼저 입사한 선배가 심심찮게 반말을 하였다. 연차가 높은 선배이거나, 연장자라면 이해를 하겠는데, 그분의 경우는 전혀 자신을 객관적으로 인지하지 못한 상태로 계속 반말을 했다. 이때 나는 “이것을 어느 수준까지 감내해야 하나” 싶었다. 그뿐만 아니라 회의나 사담 중에도 너무 자주 가르치거나, 훈계하려는 태도가 가끔 선을 넘을 때도 있었다. 그래서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마침내 지난 8월 초 사건이 터졌다. 부서 회의 중에 분분히 논쟁이 있었고, 그분이 내게 인신공격적 말을 했다. 그때 나 역시 참지 못한 채 강하게 맞받아쳤다. 곧바로 서로의 잘못을 인정하였기에 더 격화된 감정 없이 마치는 듯하였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을까. 회의는 더 이어졌지만, 회의장 전체에는 냉랭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회의 후 나는 잠시 회사에서 나와 산책하며 속으로 기도하게 되었다. “주님 이것이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그때 번개처럼 스쳐 지나가는 생각은 하나였다. 그동안의 나의 처신은 ‘어리석음’ 자체가 아니었을까?
혹시 한 달 전부터 그 사람이 비인격적인 언행을 보일 때마다 쉽게 넘어가지 말고 잘못을 짚어 주었다면 어땠을까? 혹시 그러지 못했기에 그 사람은 나를 그렇게 경시해도 된다고 여겼던 것은 아닐까? 또 이러한 나의 상황해석은 얼마나 정당한 것일까? 흥미로운 점은 그분의 경우 그 사건 이후 분명 더 남을 존중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혹시 우리가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올바른 처신을 한다면서 어쩌면 무작정 감내하고, 기독교 정신으로 상대방의 비인격적인 모습조차 무조건 용인하는 것이 정답은 아니라는 것을 주께서 알려주시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다만 계속 기도하며 직장에서도 사회에서도 하나님의 지혜와 진리를 잘 깨닫게 되기를 소망한다.
이와 같은 것이 내가 직장에서 그리스도인 청년으로서, 직장 생활 초년생으로서 개인적으로 느끼는 솔직한 어려움이었다. 과연 우리는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으로서 “대체 어느 수준까지 타인의 비인격적 언행을 참아 주고, 묵묵히 섬겨 주어야 하나? 예수님께서 행하신 수준에까지인가? 고작 나 같은 죄인이?”라는 생생한 고민이 있을 수 있다. 나 역시 지금 당장 그 정답을 쉽게 말할 수는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하나님께 계속 기도하며 지혜를 구하는 것이리라.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언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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