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자산어보> 배경
영화 자산어보(2021, 이준익 감독)는 정약전의 <자산어보>(玆山漁譜)를 기초로 만들어졌다. 정씨 가문은 중국을 통해 들어오는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고, 특히 가톨릭 신앙을 따르게 된다. 유교와 사직(社稷)을 숭앙하던 조선 왕조는 이를 반역죄로 다스리고 가차없이 탄압한다. 정씨 가문 중 큰 형 정약현은 순교하고, 그의 사위 황사영은 프랑스 군대를 보내어 신자들을 보호해 달라는 백서를 써 보내려다 발각되어 역시 순교한다. 다산의 형 정약종 또한 죽음으로 신앙을 지키므로 정씨 가문은 사교(邪敎)를 따른다는 죄목으로 파문지멸(破門之滅) 당하게 된다. 정약전은 정약용의 둘째 형으로 신유박해(순조 1년, 1801)로 인해 흑산도로 유배당한다.
흑산(黑山)에서 새 세상을 만나다
세상의 끝 흑산도로 유배된 정약전(설경구 扮). 지방 관리들로부터 모욕과 푸대접을 받는 조정의 유생은 섬사람들에겐 호기심의 대상이다. 사람이 살 수 없다는 바다 밖의 섬까지 쫓겨난 저 죄인에게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을까? 유학에 도를 튼 고고한 유생이 과연 이 섬에서 버틸 수 있을까? 이 유학자는 섬 한 귀퉁이 어느 아낙의 사랑채에 기거하게 된다.
그리고 지내던 어느 날 청년 창배(변요한 扮)와 만난다. 창배는 양반의 서자로 태어나 출세를 하고 싶지만 환경에 묻혀 꿈을 펴지 못하던 ‘상처받은’ 젊은이였다. 그래도 형설지공(螢雪之功), 와신상담(臥薪嘗膽)이랄까 구하기 힘든 사서삼경을 독파하며 독학으로 살아가던 날. 그에게는 자신도 모르는 엄청난 재능과 실력이 구비되어 있었던 것. 바다와 함께 살아온 창배는 물고기에 대해 해박한 경험을 한 터였다. 일종의 ‘물고기박사’라 해야 할 수준이었다. 한편 정약전은 바다를 거닐며 상념에 빠져 지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아! 물고기에 관한 자세한 기록을 남겨 세상 사람들을 유익하게 해야하지 않겠는가. 실학자 정약용의 형다운 통찰(Insight)이 아닐 수 없고, 학문 또한 홍익인간(弘益人間)에 기여해야 한다는 실천가다운 면모였다. 이 나이 든 유학자는 평민 창대에게 이렇게 제안한다. “내가 아는 지식과 너의 물고기 지식을 바꾸자."
사대부와 평민, 서로 스승이 되다
흑산도는 중앙 조정에서 보자면 버려진 곳이다. 같은 시기 정약용은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었고, 자신은 더 멀리 바다 건너 흑산도에 와 있다. 유배지에서 사대부 선비가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정약전은 스스로를 내려놓는다. 창대와 어깨를 같이하고 서로 공부하자고 제안하니 당시 풍습으로 보자면 파격적 제안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 여러 파격이 있다. 사대부와 평민이 바닷가에서 머리를 맞댄다는 것, 나이든 유학자와 선머슴 섬사람 젊은이가 물고기를 앞에 놓고 세심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는 것, 장유유서(長幼有序)가 엄격하던 시기에 흔치 않은 풍경이었다. 고고한 선비 유학자와 독학으로 공부하는 햇병아리 과거 도전자가 어찌 한솥밥을 먹으며 지낼 수 있단 말인가. 당시의 세계관으로 도저히 상상이 안 되는 조합이었다. 그런데 그 둘은 해냈다. 풍습의 벽을 허물고, 나이의 벽을 뛰어넘고, 신분의 차이를 없애고 정약전과 창대는 사제지정(師弟之情)을 쌓아갔다. 그렇게 해서 탄생된 것이 <자산어보>(玆山魚譜, 1814)이다. 이 책은 유학자의 실사구시(實事求是) 정신에서 탄생한 해양생물학의 한 모범이라 하겠다.
<자산어보>가 MZ에게
시대가 변해도 사람은 사람이다. 시대가 아무리 디지털, AI, 메타버스 등으로 무장하여도 사람은 여전히 아날로그이다. 이성과 감성, 그리고 영성이 어우러진 영적 존재이다. 현 세대의 젊은 층을 'MZ 세대'라 부르며 구분 짓는데 이들의 특징은 디지털 생활이 기본이고, AI 등 기기를 도구로 생각하고, 강력한 능동적 소비를 감행한다는 것이다. 이런 세대적 특징에 관하여 우려의 목소리가 적지 않다. 너무 즉흥적이고 피상적이며 감정적 소비성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자산어보를 세상에 출현케 한 힘은 사제지정이다. 그 사제지정에 사제지도(師弟之道)가 들어있다. 자산어보의 스승과 제자는 이런 상관관계를 아름답게 승화시킨다. 스승과 제자는 하나여야 한다. 스승과 제자는 격이 없어야 한다. 스승과 제자는 서로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한다. 스승과 제자는 한솥밥을 먹어야 한다. 스승과 제자는 몸과 영혼으로 부딪혀야 한다. 스승과 제자는 호연지기(浩然之氣)로 소통해야 한다. 스승과 제자는 거짓이 없어야 한다. 스승과 제자는 진실 추구라는 공통의 지향점을 가져야 한다. 스승과 제자는 서로에게 본(本)이 되어야 한다.
사랑의 본(本), 성경에 보이는 사제지도
성경에 스승과 제자 관계로 보이는 인물군이 있다. 모세와 여호수아, 엘리야와 엘리사, 예수님과 제자들, 바울 사도와 디모데 등. 예수님은 “랍비요 선생”으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4). 바울 사도는 어떻게 하셨는가.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4:16). 믿음의 주이신 예수님, 믿음의 사도이신 바울 사도 모두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낮은 자리에 내려가시고, 낮은 곳에서 섬기시며, 몸소 고난도 자처하셨다. 본의 본질은 사랑이었다. 다음 세대를 위한 교육에서 서로의 신뢰가 요구된다. 선생된 자들은 ‘버르장머리 없는 요즘 아이들’이란 선입견에서 벗어나고, 요즘 세대는 기성세대에 대하여 ‘꼰대, 일빠’로 매도하는 일이 없어야겠다. 정약전과 창대 사이에 작동하였던 본의 한 모습이 역사적 <자산어보>를 탄생시키는 이치, 현재에도 이뤄지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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