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2030 세대는 동시대 문화에 개방적인 편이다. 인터넷과 모바일에 익숙한 이들에게 정보력은 소재 발굴의 막강한 무기가 된다. 태어날 때부터 인터넷과 IT 장비를 경험한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인 소위 ‘MZ 세대’는 여러 사이트를 통해 획득한 이미지 정보가 창작의 에너지원이 되어 그들의 작품에 속속 도입된다. 이들의 작품은 기발한 아이디어로 즐거움을 선사하기도 하며 참신성으로 눈길을 사로잡기도 한다. 그러나 예술의 근간을 이루던 ‘창작’ 개념이 ‘콘텐츠 큐레이션’의 한 형태로 바뀌는 현상도 목격된다. 근래에는 ‘좀비 형식주의’(zombie Formalism)가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데 여기서는 20세기 미술의 타임라인을 가로질러 과거의 추상 모티브를 대중음악의 리믹스, 매쉬업, 샘플링 기법으로 활용한다. (그림 1)
좀비 형식주의를 알린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영원한 현재전시장면(2014)
일종의 스타일 전용(轉用)인 셈인데 과거 것의 재조합을 통해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시도에 대해 비평가 피터 쉬제들(Peter Schjeldhl)은 ‘병든 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젊은 작가들의 딜레마’를 볼 수 있다며 이 작가들은 “영감을 주기보다 불만을 자아낸다”며 일축했다. 그런가 하면 펜데믹으로 촉진된 비대면 사회를 맞아 가상으로만 존재하는 블록체인 기반의 NFT 미술과 크립토 아트(Crypto art)가 붐을 타기 시작했는데 디지털 아트에 익숙한 세대에게는 호재로 작용할 수도 있겠으나 원작이 지닌 ‘예술의 상징적 힘’과 ‘기능’을 찾아볼 수 없다는 단점을 지닌다. (그림 2)
유와23-란 작가가 제작한 디지털 러브 연작중 일부(2021) NFT 미술
정보의 폭주는 미술의 주기를 획기적으로 단축시키는 한 요인이 된다. 과거에는 100년 이상 가던 것에서 근래에는 10년, 아니 1년을 견디지 못하고 새것으로 갈아입는다. ‘좀비 형식주의’나 ‘NFT’, ‘크립토 아트’ 역시 새것을 추구하다 지친 미술가들이 선택한 고육책일지도 모른다. 이런 미술의 순환을 보면서 T. S. 엘리어트의 시 “우리가 ‘지식’ 중에서 잃어버린 ‘지혜’는 어디 있을까? 우리가 ‘정보’ 속에서 잃어버린 ‘지식’은 어디에 있을까”(<바윗돌의 합창> 중에서)라는 말이 떠오른다. 즉 정보가 홍수인 세상에서 정작 ‘마실 물’은 없다는 얘기이다.
청년 세대일수록 탐구심이 높으며 특히 요즘과 같은 정보사회에서는 외부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런데 이 외부환경이 안겨주는 문제의 본질을 정확히 통찰하지 못하면 속수무책이 되기 쉽다. 그래서 C. S 루이스는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 “눈 앞에 펼쳐지는 친숙한 일상에 눈이 팔려 생소하기만 한 미지의 존재는 믿지 못하게 되어버렸다”라고 지적한다. 이 말은 청년 작가, 특히 기독교 신앙을 지닌 작가가 현장에서 맞닥뜨릴 상대가 만만치 않음을 환기시켜준다. 온갖 방해를 물리치고 신앙과 예술이 접목된 작품을 할 수 있다면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값진 일일 것이다.
세속주의가 만연한 미술계에서 작가로서 소명을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바울이 아레오바고에서 아테네인들의 문화를 활용하여 복음을 전한 것을 전범(典範)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한시적인 현대문화라는 '아테네'를 무시간적인 그리스도와 복음의 아름다움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바로 창조적인 예술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 폴 굴드(Paul M. Gould)는 예수님이 은유와 이야기, 비유, 그리고 과장법과 다양한 창조적인 방법을 활용하여 청중들을 모이게 하셨으며 그들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이해시키도록 하셨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상상적 사유하기’(imaginative reasoning)를 제안한다. 그는 ‘상상적 사유하기’를 우리의 변증이나 교육, 예술 영역에서 증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현대인의 삶에서 성경적인 개념들, 즉 ‘죄’와 ‘영혼’, ‘용서’, ‘심판’ 등을 이해시키기 어려워져간다는 현실적 판단에 근거한 것이다. 말하자면 기독교 예술가는 세상의 지적인 상상력에 참여함으로써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이 주장도 기독교 작가가 현실 문화에 참여하는데 중요한 참고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 작가라면 좀더 큰 틀에서 우리의 문화에 대해 성찰해봐야 한다. 인간의 타락 이후 많은 부분이 죄로 손상을 입었고 예술도 예외는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세계가 부패되어 곳곳에서 탄식과 고통을 받고 있다.(그림 3)
매리 맥클레어사과나무의 아이들,종이에 혼합재료(2000)
구령(救靈) 사역도 꼭 필요하지만 카오스 상태에 빠진 문화에 ‘새로운 생명과 생동감’(Albert Wolters)을 불어넣는 것 역시 그리스도인의 몫이다. 성숙한 작가라면 세상의 물신주의, 환경문제, 약자 존중, 인권, 시민으로서의 책임 등에도 관심을 기울여 문화를 회복하는 일에 주력해야 할 것이다. 남들처럼 ‘선망받는 스타’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 청년 작가의 소망은 아니다. 우리가 개인적인 욕망에 휘둘릴수록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일은 후 순위로 밀려날 것이며 그럴 경우 리트머스 종이처럼 점차 세속문화에 물들어갈 것이다. 청년 작가의 설 자리는 예술계이다. 아테네처럼 세속문화가 범람하는 소굴이 우리의 사역지이다. 소명을 지닌 예술가의 초대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명망가나 엘리트, 시장 종사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뜻밖에도 우리 가까이에 있다.
“불모지대는 멀리 떨어져 있는 남방 열대지대에 있지 않고, 불모지대는 당신 가까이에 있는 지하철 안에 비집고 들어와 있으니 불모지대는 당신 형제의 가슴 속에 있다”(T. S. Eli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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