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내 눈에 보이지 않았던 이야기
<누가 빈곤의 도시를 만드는가> / 탁장한 / 필요한 책 / 2021
친구에게 오랜만에 반가운 연락을 받았다. 대학원 성경공부 모임에서 만난 친구가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했는데, 저서 <누가 빈곤의 도시를 만드는가>의 발간 소식을 전해왔다. 이 책은 서울 동자동 쪽방촌 사람들의 이야기다. 저자는 현재 쪽방촌에서 쪽방 비슷한 방을 얻어 살고 있다고 했다. 그곳에서 주민들과 함께 살며 도시빈민 연구가로 살고 있었다. 그래서 이 책은 어쩌면 쪽방촌 주민들의 진짜 삶의 자리와 목소리를 들려주는 이야기다. 바야흐로 누구나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고 자기의 미디어를 가지는 시대가 왔다. 하지만 스스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니, 어쩌면 목소리를 내어도 제대로 들리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저자가 그 목소리들을 대신 함께 내어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동자동 9-20 사태
이 책은 동자동 쪽방촌 주민들의 ‘대항기억’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2015년 2월 한겨울, 동자동 쪽방촌 한 건물에는 쪽방 건물 공사를 해야 한다며 건물주가 세입자 전원에게 자진 퇴거를 요구하는 계고장이 붙었다. 건물주 입장에서는 합당한 요구였을지 몰라도 한겨울에 여기 아니면 갈 곳이 없는 쪽방촌 주민들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구였다. 예전이라면 무기력하게 쫓겨났을 쪽방촌 주민들은 생존을 위한 투쟁을 시작했다. 민원을 제기하고, 버티고, 공론화를 시키는 등 적극적인 투쟁으로 가까스로 주거권을 지켜낸 투쟁, 이를 '동자동 9-20 사태'라고 부른다.
쪽방도 필요하다
쪽방촌을 재개발하겠다는 결정, 열악한 환경을 개선하는 계획은 언뜻 당연하고 괜찮아보인다. 그러나 이 아이디어에 원래 쪽방에서 살던 ‘사람들의 삶'에 대한 고려는 없다. 쪽방이 없어질 때마다 쪽방에 살던 사람들이 갈 곳도 함께 없어진다. 쪽방이 아무리 열악한 거주환경이라도 길거리로 나앉기 전 최후의 수단으로 쪽방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삶이 있다. 도시 안에는 다양한 주거 형태가 필요하고, 쪽방촌도 그게 아무리 열악한 형태일지라도 누군가에게는 절실한 공간이다. 도시빈민들의 생존권과 거주권을 보장하는 대책으로 저자는 ‘공공 쪽방’, 구체적으로는 ‘쪽방 매입형 공공주택 모델' 도입을 제안한다. 쪽방촌 건물의 소유권이 민간에게 있는 이상 도시빈민의 주거환경이 개선되기는 어려우며, 정부가 쪽방촌 토지나 건물을 매입해 공공 쪽방을 공급한다는 아이디어다. 공식적인 쪽방촌 주민인 ‘건물주'가 아니라 실질적인 쪽방촌 주민인 ‘쪽방촌 사람들'을 위한 주택 정책이 필요하다.
쪽방촌 주민들이 살아갈 힘, 공동체성
쪽방촌에 살다가 임대주택에 살게 되면 행복할까? 저자는 임대주택의 물리적 여건은 쪽방촌보다 월등하지만, 실상은 임대주택이 삶을 영위하기에는 더 고독한 공간임을 지적한다. 그 고독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쪽방촌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있다. 책에서 ‘삶의 터전으로서의 쪽방촌’을 주목한 점이 인상적이다. 좁은 공간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기 때문에 형성될 수밖에 없었던 쪽방촌 마을이 역설적으로 내부 인간관계의 밀도를, 사회적 자본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아무리 열악해도 쪽방촌에는 서로를 위한 마음이 있고 사람 사이에 오고가는 정이 있었다. 주택 정책에서는 이 농밀한 네트워크에 대한 고려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저자는 지적한다. 사람들이 구체적인 삶을 떠올릴 줄 아는 상상력이 정책에 필요하다는 것이다.
쪽방을 어떻게 보여주는가?
책을 읽는 내내 ‘연결감’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쪽방촌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내 이웃의 이야기로 인식할 수 있는가? 이것은 어쩌면 미디어의 역할이다. 저자는 미디어가 빈곤을 어떻게 조명하고 소개했는지를 상세히 살폈다. 미디어가 무엇을 어떻게 보여주는지에 따라 대중은 빈곤에 대한 이미지를 달리 형성한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진지한 공감을 하게 되는가? 내 곁의 사람들의 일로 인식하게 되는가? 미디어가 진지하게 던져야 할 질문이다.
쪽방촌이나 도시빈민 이야기는 내가 사는 세상 속에 없는 이야기였다. 같은 하늘 아래 살지만 마주칠 일이 없고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류의 기사를 접할 때면 잠깐 마음 아파하다가도 금방 잊어버리고 잘 지냈다. 2015년 성탄절 쪽방촌 봉사활동에 참여한 적 있다. 봉사하러 간 곳이 ‘동자동’ 쪽방촌이었다는 걸 이 책을 읽으며 알았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보다는 내가 봉사활동을 한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던 것 같다. 저자가 들려주는 쪽방촌 이야기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교회를 다니고 있고, 사회복지를 공부했다고 하지만, 누구를 위한 이웃사랑인지, 누구를 위한 사회복지였는지 자문하게 된다. 저자가 쪽방촌에 들어가 그들과 연대하는 삶은 존경스럽지만 나에게도, 어느 누구에게라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일 것 같다. 다만 이 책은 내게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나와 연결된 사람들의 범위를 확장해서 생각하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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