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2018년에 예멘 난민들의 일부, 2021년에는 아프가니스탄 난민의 일부가 한국으로 피난했다. 극소수의 예멘 난민들이 피난해온 당시 한국 사회, 특히 일부 교회 일각에서 수긍할 수 있는 ‘낯섦’의 정도를 넘어 난민들을 추방해야 한다는 목소리뿐만 아니라, 난민들이 들어오면 한국의 경제가 무너지거나 한국이 이슬람화될 것이라는 과격한 주장까지 들렸던 것이 아직도 기억난다. 강도 만난 자 앞에서 사마리아인의 행동을 설명하시며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 10:37)라고 말씀하신 주님께 순종하는 교회가 이런 행동에 동참했던 것은 지금도 회개해야 할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다행히도 아프가니스탄 난민들의 이번 피난에 대해서는 반응이 조금 다르다. 한국 정부가 정무적 고려로 ‘난민’이란 이름을 쓰지 않고 ‘한국에 기여한 사람들‘의 공로를 포상하는 것처럼 포장한 것도 그 이유다. 아프가니스탄과 한국 사이의 관계를 예멘과 달리 더 많이 시민들이 알았던 것, 탈레반의 억압 정도에 대한 시민들이 공감대가 넓었던 것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여전한 일부 난민혐오 취지의 표현들이 언론사 기사의 댓글에서 나타나긴 하지만 반응은 조금 다르다. 낯설지만 공감하고 우리의 공간을 열어 환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조금씩 성숙해가고 있는 우리 사회는 이제 난민혐오의 주장을 지적하는 걸 넘어, 다수가 택하고 있는 근본적 태도를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사람들을 완벽히 ‘소비자, 근로자’로서만 존재하는 개인으로 단절시켜가고 있다. 사람들은 종종 모든 문제에 있어서 “나하고 무슨 상관입니까?”라고 암묵적으로 묻고, 교회에서도 하나님 형상의 고통에 대해서 공감하기보다는 마찬가지 태도를 보인다. 시리아에서 전쟁이 있어도, 아프가니스탄에서 여성과 아동에 대한 억압이 있어도, 나하고 무슨 상관이냐고 한다. 기후 위기는 다음 세대의 문제이기에 나하고는 상관이 없고, 다만 오늘 내가 먹고 마실 자유는 제한당하지 말아야 한다고 한다. 주거 정의가 실현되지 않아 집을 구할 수 없는 사람들이 속출해도, 내가 가진 부동산과 주식만 오른다면 쾌재를 부른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로 가면서 더욱 강화되어 사람들을 서로 개별화시키는 이와 같은 ‘단절’은 단지 사회적 현상만은 아니다. 공중 권세 잡은 자의 활동 중의 하나는 이와 같이 ‘연결’된 관계를 잘라내는 것이다. 바로 “너하고, 교회하고 도대체 아프가니스탄 난민이 무슨 관계가 있어?”라고 소수자 집단과 사이를 가르는 것이다. 국적이 다르다면 차별이 당연하다고 한다. 경제 수준이 다르다고 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차별해야 한다고 한다. 종교가 다르면 적이라고 한다. 성별이 다르면 우월한 성과 그렇지 않은 성이 있다고 한다. “학대당하는 사람들은 안타깝지만 그런 환경 속에 태어났다면 어쩔 수 없지. 네가 세상 모든 문제를 다 짊어질 수는 없잖아.”라고 한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초월하는 연결성을 내포하고 있다. 사회학적으로는 ‘연대’라고 표현된다. 국적, 인종, 나이, 성별을 가로질러 갑자기 ‘형제, 자매’가 된다. 역사와 시간을 가로질러 ‘공동체’라고 한다. 수많은 차이를 가로질러 ‘피조 세계’가 된다. ‘고통’ 속에 모든 민족, 모든 피조물이 함께 신음하고, “주여 언제까지니이까”라고 탄원하는 ‘한 편’의 탄원 시가 된다.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에서 고통받으심은 사실 영원과 찰나 사이의 강을 가로질러 모든 ‘죄인 중의 괴수’와 한 몸 됨을 선택하신 무서운 사건이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마 25:40)이라는 주님의 말씀은 다음 같은 것을 의미한다. 즉, 주님이 바로 교회가 낯설어하는 주리고, 갇히고, 가족이 찢어지고, 추방되는 난민의 얼굴로 피곤한 몸을 이끌고 한국을 찾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난민 인권 활동을 하며 사람들을 ‘얼굴’로서 만나다가 경험하는 것은, 이런 단절의 극복이다. ‘우리의 이야기’, ‘내 친구의 이야기’가 된다. 시리아 전쟁, 미얀마의 군부 쿠데타를 통해 생겨난 난민들, 그리고 미라클 작전에도 불구하고 비행기에 탑승하지 못해 아프가니스탄에 숨어서 다니고 있는 난민들이 ‘친구’의 이야기로 들린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박해와 나의 삶이 연결되는 것을 발견한다. 한국을 찾은 난민들의 인종, 종교, 국적이란 지표가 아닌, 지표가 걷어진 벌거벗은 인간으로서의 동등성과 연결성을 발견하게 된다. 오히려 그와 같은 지표로 하나님의 형상이 갖는 존엄이 침해될 때, 사회의 구조와 인식이 이들을 압제할 때, 이들이 받는 고통이 나의 고통처럼 여겨진다.
어쩌면 교회가 누군가의 ‘곁’이 된다는 것, ‘집이 없는 자들의 집’이 된다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능력으로 할 수 없는, 함께 고난받는 외양을 감히 함께 선택해보려 시도하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라는 주님의 언명은 결국 성육신으로 ‘모두의 고통’을 이미 체현하고 있는 것이기에, 주님의 몸 된 교회는 마땅히 그 고통과 신음에 함께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2021년 아프가니스탄 난민들이 지친 몸을 이끌고 미래에 대한 불안과 자녀의 미래에 대한 걱정을 안고 한국에 왔다. 200여 명에 이르는 10세 미만의 어린이들, 주님은 그들의 얼굴로 한국 사회의 문을 두드리신다. 이것이 우리가 “나와 무슨 상관입니까?”라며 고개 돌려 가던 길을 그냥 지나가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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